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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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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강완주선생은 1956년생으로 경희대 교수로 재직하다 그의 나이 45세에 작고하였다.

그의 나이 29세에 1984년 경희대 요업공예과를 졸업한 후 바로 필라델피아 대학(Philadelphia College of Art) 도예과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1986년에는 졸업과 동시에 졸업전성격의 첫 전시를 필라델피아 갤러리(Philadelphia Sculpture Gallery)에서 열었고 그의 나이 31세에 미국 뉴욕의 로드아일랜드 디자인대학원에서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2년 후 졸업하였다.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로드아일랜드 대학원에서의 생활은 자유로운 창작정신을 지향하던 강완주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로드아일랜드 대학원 졸업 후 귀국한 강완주는 곧 모교인 경희대학교에서 시간강사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그간의 작품을 모아 지금은 다fms 갤러리로 이름이 바뀐 안국동 고궁화랑에서 국내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강완주의 첫 개인전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88올림픽을 기념으로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현대도예의 경향이 국내에 소개되었고 국내 조형도자의 개념이 명확히 자리잡지 못한 현실 속에서 강완주의 실용성을 배제한 순수조형주의 지향의 작품들은 젊은 도예가들을 중심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공예전반에 걸쳐 실용적인 작품경향에서 벗어나 조형으로 급격히 조류가 바뀌고 있던 시점에서 강완주의 등장은 신선한 자극이 되기에 충분했다.

첫 개인전의 작품은 상당히 추상적이면서도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한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알이 깨어져가는 상황을 타원형의 형태로 설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흙의 느낌을 살리는 작품을 보여주었다.

1991년에 열린 두 번째 개인전은 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지각에서 좀 더 발전하여 아버지의 죽음으로 비롯된 자기 독백에 가까웠다. 1989년 첫 개인전 이후 강완주의 이력은 도예계의 주목을 받으며 아들의 출산, 상명대 교수임용 등 승승장구하는 듯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인생에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작업실에서 홀로 있는 시간 동안 슬픔을 감내하여 상실감을 극복하려 했던 자기 몸부림이 두 번째 개인전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세 번째 개인전은 1994년 토아트 스페이스에서 열렸다. 2회 때와는 다르게 그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인생의 순환이자 질서로 인식하려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삶과 죽음을 동시에 다루면서도 ‘죽음’의 이미지를 강조하던 강완주의 작품은 당시 국내외그룹전과 초대전에서 활발히 볼 수 있었다.

 

1995년에는 디자인연구소장직을 맡아 학교의 특성과 정책 상 산업도자기제품개발에 주력 하였고, 현대도예비엔날레 추진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는 서울 후암동에 새로 건립한 <새나리 공원>에 환경조형물을 설치하였고 1998년도에는 상명대 디자인대학장을 역임하면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투병기간 중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여러 유명 도예전과 워크샵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의 마지막 전시회는 미국 롱아일랜드 초청으로 힐우드미술관에서 개최되었으며 돌아온  1년여의 병고 끝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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