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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다 쇼지(Hamada Shoji, 濱田庄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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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다 쇼지(Hamada Shoji, 濱田庄司)

 

 


 


하마다 쇼지(Hamada Shoji, 濱田庄司)는 189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하마다는 그의 나이 8세에 도쿄 예술학교(Tokyo School of Fine Art)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나이 16세, 하마다는 우연한 기회에 공예에 대해 뜨거운 애정을 품게 되었고  이 시기에 제작한 목각제품들은 잡지에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미술공모전에서 수상하기도 하여 이것을 기회로 공예가로서 첫 행보를 내딛었다.

1912년 어느 날,하마다는 도쿄 긴자지역 한 갤러리에서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가 그린 에칭과 도자기작품들를 처음 보게 되었다. 리치의 작품에 감명을 받은 하마다는 도예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의 나이 19세에 도쿄기술대학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의 오랜 절친한 친구이자 도예가인 간지로 카와이(Kanjiro Kawai)를 만났고 1916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쇼지는 당시 유명한 도예가였던 겐지치 토미모토(Kenkichi Tomimoto)를 찾아가 절친한 친구사이가 되면서 세 명의 도예가는 2년 후에 그들은 의기투합하여 일본의 전통 도예촌과 도요지들을 찾아다니며 일본 전통도자기를 익히기도 하는 등 평생 도예가로서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1918년은 하마다에게 중요한 한 해였다. 하마다가 도예가가 되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장본인이자 평생 친구이자 동료였던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를 리치의 도쿄 개인전에서 그를 처음 대면한 것이다. 이에 멈추지 않고 친구였던 야나기 무네요시와 간지로 카와이와 함께 4명이 한국, 중국을 여행하기도 하였는데 이 여행은 후에 그들의 작품의 기반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민예운동의 태동과 부흥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20년, 리치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한 하마다 쇼지는 런던에 머무는 동안 앤티크 경매장과 앤티크샵, 대영 박물관에서 본 영국 도자기, 특히 초기 영국 슬립웨어를 공부하며 서양 도자기에 대한 견문을 쌓아나갔다. 또한 3년동안 리치의 작업장인 세인트 아이브스 포터리(St Ives Pottery)에 일본식 오름가마인 아나가마를 짓는 등 리치의 작업장이 빠른 시간 안에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23년에 런던의 올드 본드가(街)에 위치한 패터슨갤러리(Paterson`s Gallery)에서 두 번의 개인전을 열고난 후 계속 런던에 머물던 하마다는 일본 도쿄 대지진 소식을 들은 후 일본으로 귀국을 서둘렀지만 바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친구 가와이로부터의 충고를 받아들여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등을 여행한 후에야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24년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마시코에 자신의 작업장을 짓고 결혼도 했다. 마시코에 작업장을 짓자마자 하마다는 옛 방법대로 작은 주전자에 나무와 산이 어울린 풍경을 그려 넣는 법을 배웠다.
마시코 작업장 전경

하마다가 디자인 한 등 ( "도치기 현"의 남동부에 있으며, "간토 평야"의 북쪽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현립자연공원에 속해 있는 마시코"는 일본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알려진 도기의 산지로서 19세기 중반 "오쓰카 게이사부로"가 "오쓰사와"에서 도기용 점토를 발견하여 도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마시코"의 도기의 유래다. 그러나 지금 그 수가 380채를 넘는 도예공방과 매년 봄과 가을에 30만의 인파가 몰리는 도자기축제가 열리는 지금의 마시코는·"하마다 쇼지"가 "마시코"에 가마를 만든 것이 계기가 되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6년 야나기, 가와이, 하마다는 산속 수도원에 함께 은거하며 이름없는 민초들의 삶과 정신이 깃들어 있는 민예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에 동감하고 이를 알리기 위한 전국공예연합 설립을 주창했다. 또 이들은 후에 도쿄에 야나기와 하마다가 그동안 모아온 민예품으로 일본 민예박물관을 설립하는 데 뜻을 모았다. 후에 민예박물관은 쿠라시키를 비롯하여 오키나와섬같은 일본의 다른 지방에도 설립되는 등 일본 공예문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박물관들의 설립은 주로  하마다와 리치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그밖에도 이름 없는 많은 공예가들의 작품들을 아끼고 그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려는 전 세계 수많은 후원자 및 애호가들의 성원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29년과 1931년 다시 패터슨갤러리(Paterson`s Gallery)에서 개인전을 연 이후 하마다는 1932년 리치와 함께 한 미국방문을 첫 방문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도예인생 50년간 수없이 미국을 방문하며 일본 도예계 뿐 아니라 미국현대도예의 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52년 야나기와 함께 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초인나드 아트 인스티튜트(Choinard Art Institute)에서 3주간 보여준 강연과 워크샵은 민예운동에 대한 하마다 쇼지와 버나드 리치의 열정, 그들의 활동과 작품들, 그들의 삶의 방식을 전 미국 도예가들에게 유행시키며 전 세계에 일본도자를 알리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의 50년 도예인생 동안 하마다 쇼지는 천목유약, 쌀겨를 이용한 유약, 감나무재를 이용한 유약 등 자신만의 독특하고 훌륭한 유약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작품에 헌신했다. 그의 작품은 매우 단순한 디자인형태에 기초하면서도 우리들에게 긴장감과 강력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것은 전통에서 출발하였으나 하마다 쇼지의 작품은 극히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선과 미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절제된 선과 자유자재로 구사되는 성형기술은 흙의 맛과 유약의 효과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노련미와 만나 더욱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는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 도예가들에게 최고의 도예가이자 도달해야할 목표로 추앙받고 있다.

1955년 그는 처음으로 ‘국가적인 살아있는 보물’이라는 칭호를 도미모토, 아라사와, 이시구로와 함께 일본정부로부터 수여받았을 뿐 아니라 오키타와 타임즈상, 마시코 시민상, 미국 미시간 대학과 영국 킹칼리지 명예박사학위, 일본민예미술관장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78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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