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의 도자)1.베트남의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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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의 도자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는 지역을 하나로 묶어 동남아시아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 지역 전체가 균일한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남아시아라는 지역은 대개 서쪽으로는 방글라데시와 동쪽으로는 뉴기니섬의 이리안자야를 경계로 한 곳으로써, 지도상에서 보면 ·인도와 중국 사이에·끼여 있는 지역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문화적으로는 서쪽으로부터 들어 온 힌두적 요소와 이슬람적 요소, 동쪽에서부터 유입된 중국적 요소, 그리고 동남아 각 지역 고유의 요소들이 지역별로 균형이 달라서 문화와 역사가 복잡하게 전개되어 왔다. 이는 도자사에 있어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각 지역마다 서로 개성이 풍부한 도자기를 생산한다거나 시작과 끝이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르다는 점을 보면 그러한 복잡한 상황을 알 수 있다. 한편 도자기 제작지의 관점에서 동남아를 개관하면 반도(半島)지역과 도서(島嶼)지역으로 뚜렷하게 양분된다. 근대 이전에 유약을 씌운 도자기는 반도지역에서만 제작되었으며 도서지역에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유도(施釉陶)는 베트남·참파·크메르·수코타이(아유타야)·란나타이·파간·페구 등의 왕조(王朝)가 번영한 지역에서 제작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오늘날의 인도차이나반도에 속하는 곳이다. 1. 베트남의 도자 현대 베트남은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송코이강(紅河) 유역의 북부와 안남산맥과 남지나해의 사이에 길게 뻗어 있는 중부, 메콩강 삼각주 주변의 남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가운데 중부는 15세기까지 힌두적 문화를 유지한 참인의 왕국 참파에 속해 있었으며 남부는 18세기경까지 크메르인의 캄보디아 영역에 속해 있었다. 가장 다채로운 시유도(施釉陶)를 제작한 곳은 북부지역이다. 이 지역은 한(漢)시대 이후 10세기경까지 중국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중국문화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았다. 독립 후에는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적인 관료제도와 유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했다. 말하자면 ·탈중국화를 위한 중국화·라는 복잡한 입장인데, 이러한 입장은 도자기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북속(北屬)시대 베트남 도자 가운데 최초의 시유도는 중국 한(漢)의 청동기와 비슷한 형태를 한 것으로써, 흰색에 가까운 고운 태토(胎土)에 균일한 상태의 회유(灰釉)를 얇게 씌운 단정한 형태의 작품이 많다. 동물장식의 손잡이[獸環]를 붙인 높은 굽 항아리[臺付壺, 鐘]와 귀 붙인 배[耳杯], 발(鉢), 삼족정(三足鼎) 등 기종(器種)과 형태가 다양하며, 닭 머리 모양을 장식한 것 등은 베트남의 특징적인 것이다. 그 밖에 중국 남북조시대에 절강성 월주요의 고월자(古越磁) 양식의 청자천계호(靑磁天鷄壺)와 수(隋) 양식의 회유완(灰釉碗), 당(唐)의 광동성지역의 도자기와 제작 경향이 비슷하다. 그릇의 안바닥에 큰 네모 난 내화토받침이 여러 개 붙어있는 회유완(灰釉碗), 당(唐)시대에 중국 남부지방의 것과 비슷한 형식의 귀항아리(耳付壺) 등이 베트남 도자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여러 예를 보면 베트남에 오래 전부터 시유도의 전통이 계승되어 왔던 것이 분명하다. 938년 베트남은 중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자립하게 되었으며, 1010년에 이공온(李公·)이 일으킨 이조(李朝)에 의해 처음으로 안정된 독립국가가 되었다. 독자적인 도자 양식이 전개되기 시작한 때는 베트남이 독립국가로 발전된 이조시대(1010~1225년) 이후로 생각되고 있다. 이 시대 도자의 대표적인 것은 질이 좋은 백자이며 두께가 아주 얇고 예리하게 만든 기형이 많다. 뒤에 진조(陳朝)의 백자와 비교하면 생산량이 적어서 상층계급을 위해 한정적으로 생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굽이 높고 두께가 얇은 완(碗)과 접시 (皿), 연판문(蓮瓣文)을 두른 그릇받침[器臺], 짧은주구(注口)와 작은 손잡이가 달린 납작한 주전자, 앵무새(鸚鵡)를 본 떠 만든 용기 등이 있다. 장식은 두껍게 조각한 연판문(蓮瓣文)과 앵무새 형태의 손잡이를 붙인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 흑유와 백유로 연화(蓮花)를 나누어 칠한 것, 문양의 일부에 작은 철채(鐵彩)로 점으로 찍은 것 등 철채를 이용한 장식을 볼 수 있다. 완과 접시 등에는 동시대의 중국도자의 영향이 인정되고 있지만 두껍게 조각한 연판문과 앵무새 모양의 장식, 흑유 장식기법(塗り分け, 백자 바탕에 문양 부분을 흑유로 칠한 것))과 같은 특수한 기법은 베트남의 독자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백자 완과 접시들의 안바닥(見·み)에는 모래비짐(砂粒)이 둥근 고리 형태(輪狀)으로 붙은 것과 작고 둥근 비짐 흔적(目跡)이 드문 드문 나타나 있다. 모래비짐이란 그릇들을 포개어 굽는 과정(重ね燒き)에서 위에 놓이는 그릇 굽의 접지면(接地面)과 밑에 받쳐지는 그릇의 안바닥(見·み)이 녹아 붙지 않게 내화도(耐火度)가 높은 재료(모래가 많이 포함된 耐火粘土)로 받쳐 놓은 것을 말한다. 태토(胎土)는 희고 고운 편이며 때로는 아주 고운 백토를 얇게 바르는 백화장(白化粧)을 한 것도 있다. 그리고 굽 안바닥에 산화철(산화철을 굽 안바닥에 얇게 칠하는 것을 鐵銹라고 함)를 칠한 예가 드물게 있다. 소위 chocolate bottom(鐵銹)이라고 불리는 기법은 베트남도자의 큰 특징으로서 이조시대에 이 기법이 나타나세 14세기 이후부터 증가하고 있다. 진조(陳朝, 1225~1400년)는 베트남 도자가 질과 양의 측면에서 큰 발전을 하며 전개되는 시기이다. 다양한 종류의 백자·청자·흑유·녹색유·갈색유·백유갈채(白釉褐彩)가 만들어졌으며 후기에는 철화(鐵繪)와 청화(靑畵)기법이 등장한다. 기종은 실용적인 완·접시·주전자·항아리(壺)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기형과 문양에는 중국도자로부터 도입한 것을 많이 볼 수 있는 반면 베트남 특유의 요소도 뒤지지 않게 풍부하며 두가지가 융합되어 있는 것도 많다. 중국적 요소로서는 용천요(龍泉窯) 청자와 원(元)의 추부(樞府)백자, 중국 남부의 청자·청백자 등의 유약과 형태 및 문양 등에서 영향이 나타나 있다. 베트남 특유의 기형으로는 참외 모양(瓜形)의 주전자에 곡선적인 동물장식의 주구(注口)와 짧은 손잡이가 달린 것, 구연이 끌어 안는 형태의 대형 뚜껑 달린 발이 있다. 문양은 羊齒와 같은 초엽문(草葉文)을 펼쳐 그린 당초상(唐草狀) 문양으로서, 이들은 꼼꼼한 조각기법으로 새기거나 또는 흐트러진 인화기법이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 볼 때 진조시대 전 기간에 오랫동안 애호되었던 문양으로 생각된다. 녹유(綠釉)와 백유갈채(白釉褐彩) 기법은 베트남 도자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기법이다. 녹유는 산화동(酸化銅)의 색을 띠는 고화도(高火度) 유약으로서 일본의 오리베(美濃窯의 織部)와 같은 계통이며, 깊은 색조와 강한 광택을 띠고 있다. 중국의 경우 광서성(廣西省)에 있는 송(宋)시대의 가마에서 사용된 예를 제외하면 거의 볼 수 없는 특수한 기법이다. 이 녹유기법은 안바닥에 둥근 테 형태로 유약을 긁어 낸 완과 접시에 대부분 나타나는 것으로 진조 후기에 해당하는 14세기에 시작된 기법으로 생각된다. 녹유는 진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완과 접시와 같은 그릇에 단색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촉대(燭臺) 등 규모가 큰 것에는 갈유(褐釉)와 함께 사용되기도 하여 고화도(高火度) 삼채(三彩)라고 할 수 있는 장식효과를 냈다. 백유갈채(白釉褐彩)는 문양의 윤곽선을 음각하고 그 선을 기준으로 문양 내면을 갈색유로 칠하고 본 바탕인 배경은 투명유로 나누어 칠한 것이다. 발(鉢)의 측면이나 동물형 장식 그릇의 세부 및 크고 작은 술항아리 형태의 그릇(樽型壺)의 측면에 문양을 그린 것이 있으며, 특히 대형 술항아리 형태의 그릇 측면에는 연지문(蓮池文)과 수렵문(狩獵文) 등 다이나믹한 그림과 같은 문양도 볼 수 있다. 철화(鐵畵)의 안료(鐵繪の具)로 문양을 그리고 그 위에 투명유를 씌운 철화기법은 진조시대부터 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백자와 같은 기형의 주전자와 항아리의 어깨에 아주 간단한 화문이나 당초문을 그린 작품이 남아 있으며, 그릇의 내면에 초화문을 그린 완과 접시 등이 필리핀과 인도 등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철화초화문완 계통은 활발하게 수출되고 있었다. 예컨대, 일본의 다자이후(大宰府) 유적에서 출토한 유사한 완은 같은 층에서 발견된 목간(木簡)의 묵서명(墨書銘)으로 추정해 볼 때 1330년경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여기서 출토된 철화기법 완의 문양과 완전히 같은 형태의 초화문을 그린 청화(靑畵) 완과 접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14세기 중반 베트남에서 청화기법을 써서 문양을 그린 도자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가리켜 준다. 진조시대의 청자·백자·갈유·녹유의 완과 접시에는 안바닥 면에 삼각형의 내화토비짐 흔적이 몇 개씩 붙은 것과 유약을 원형의 테 상태로 긁은 것이 있다. 후자는 (蛇의 目釉剝ぎ)라고 불리는 것으로 대량생산을 위해 그릇들을 차례차례 쌓아 올릴 때에 사용되는 수법으로서, 베트남 도자가 양산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국외로부터의 출토 사례도 많아지기 시작한다. 진조 후기인 14세기에 베트남 도자는 생산량이 상당히 늘어 해외 수출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14세기 후반은 1368년 중국의 신흥 명(明)나라가 1371년부터 해금(海禁)정책을 내세우고 민간의 자유무역을 엄격히 제한했던 시기이다. 당연히 중국에서 수출하는 도자에 큰 영향이 미쳤을 것이며 이러한 중국도자의 수출량 감소를 보충하는 형태로 베트남에서 수출이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진조시대에 꽃핀 다양한 유색(釉色)의 도자는 그 후에도 변모하면서 여조(黎朝)시대로 이어지면서 단색유와 백유갈채 기법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청화백자가 주요한 위치로 등장하고 오채(五彩)가 나타난다. 여조는 진조 말기에 있었던 정권 다툼으로 명의 군대가 개입했던 속명(屬明)시대(1413~1427)의 종지부를 찍은 여리(黎利)에 의해 일어났다. 여조시대는 18세기 말까지(1428~1786) 이어지는 왕조인데 그 후반(1627~)에는 북부의 정(鄭)씨와 중·남부의 원(阮)씨가 실제 권력자로서 항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간 베트남 세력은 남쪽으로 뻗쳐 중부에 다았으며 해상무역의 요충지로 번성했던 참파왕국를 멸망시키고(1471) 크메르의 영역이었던 메콩강 하류지역까지 진출했다. 여조가 가장 안정되고 번성했던 시기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이며 가장 뛰어난 여조 도자기 번조된 것도 이 시기이다. 여조시대 도자를 대표하는 것은 청화(靑畵)이다. 이 베트남 청화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터키 Topkapi 궁전에 전하는 〈大和8年(1450)銘 靑畵牡丹唐草文甁〉이다. 이 병에 그려져 있는 모단당초문은 얼핏 보기에 중국 원(元)시대의 양식이지만 붓놀림(筆法)과 전체 구성은 중국 것과는 상당히 다르며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 Topkapi 궁전의 〈청화병〉을 비롯해 1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화에는 꼼꼼한 붓놀림으로 정성껏 그려진 우수한 작품이 많으며, 백토로 충분히 분장한 후 질이 좋은 코발트를 사용해 그리기 때문에 청화의 발색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완전한 자기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여조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뛰어난 청화의 경우도 태토 바탕은 그대로 둔 상태에서 완전한 백자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반드시 백토를 분장한 후 그 위에 약간 황녹색을 띠는 투명유를 씌우게 되는데, 결국 표면은 엷은 황색을 띠는 부드러운 분위기로 마무리된다. 베트남 청자에는 동물 묘사를 뛰어나게 한 것이 많다. 당시 중국 청자에는 길상(吉祥)을 상징하는 동물을 단조롭게 그렸는데, 베트남의 경우는 문양으로서가 아니라 동물 그 자체를 사실성 높게 그리는데 중점을 두어서 새와 짐승의 영리하고 맹열함은 물론 물고기의 비린내까지 전해지는 것 같은 묘사가 많다. 그리고 산수(山水)와 바위에 대나무 그림과 같은 베트남 특유의 문양도 있다. 그리고 항아리의 아랫 부분(低部)이나 넓은 반(盤)의 외곽에 빠지지 않고 그리는 연판문(蓮辨文)은 그 문양대 안에 다양한 문양을 빽빽이 채워 넣은 특이한 형식을 보인다. 청화에는 완과 접시는 물론, 반·대호(大壺) 등 크기가 큰 그릇에서부터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동물을 본뜬 연적(硯滴)과 직경 2㎝ 이하의 작은 합(盒)까지 다양한 것들이 있다. 그 중에서 반(盤)이나 동물형 연적은 여조시대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기형으로서 인도네시아 등지에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네시아의 마자파히트왕조의 왕궁이 있었던 곳에서는 건축장식용의 베트남 청자와 오채(五彩) 타일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마자파히트에서 베트남에 특별히 주문한 제품으로 생각되며 베트남 도자기 산업이 성숙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베트남 청화는 15세기말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점차 양산 체제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근년에 인양된 호이안 앞바다 침몰선에는 30만점 가까운 베트남 청화와 오채(五彩)가 발견되었다. 이 배에는 아름다운 발색의 정교한 문양을 그린 작품과 어두운 발색으로 간략한 문양을 그린 작품이 함께 실려 있었으며 이 무렵부터 다양한 구매자에 맞춘 양산체제를 도입했음이 밝혀져 있다. 15세기에는 오채(五彩)도 만들었다. 베트남 오채의 특징은 상회(上繪, 유약 위에 저화도 안료로 채색하는 기법) 뿐 아니라 청화를 병용하고 있으며 고급 작품에는 금채(金彩)를 써서 호화롭고 농후한 표현을 한 것이 많다. 16세기후기부터 제작시기인 연·월·일과 시주(施主)의 이름이 들어간 대형 향로(香爐)와 촛대(燭臺)가 눈에 띄게 많아지게 되며 이와 함께 베트남식의 그림을 그린 음식기는 수가 줄어들고 중국 것을 모방하여 조잡하게 만든 완(碗)이 늘어난다. 16세기는 왕위찬탈로 시작되는 혼란의 시대이며, 이러한 내란과정에서 생산지가 휘말려 베트남 도자는 점차 퇴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베트남의 도자는 그 후에도 단절되지 않고 현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근대 도자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으며 중국도자 다음이라는 위치에 만족했던 것 같다. 거대한 중국의 수출도자의 물결에 의해 삼켜져 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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