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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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도자의 현대조형 의지-윤광조 1946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윤광조는 8·15 해방 후 미 군정청의 고위직 관리를 지낸 아버지를 여의고 6세 때부터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자유롭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해군이나 마도로스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이 꿈은 해군 사관학교 낙방과 함께 좌절되었고, 이듬해 어머니의 권유로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응시하였으나 다시 낙방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대한 부인회 초대 조직 부장을 지내는 등 정치 분야에서 열심이었는데, 아들역시 정치가가 되기를 원하여 경제학을 권하였다. 그러나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정치나 경제학은 관심 밖이었다. 고민과 방황을 하던 그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준 이는 그와 가장 친했던 셋째 형이었다. 형은 미국인들이 한국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한국문화를 공부했는데, 한국의 도자기에서 예술의 진가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만들기를 좋아하고 재주가 뛰어났던 동생에게 도자기를 추천하였고, 이에 윤광조는 집안의 반대를 가출로 대응하면서, 1965년 홍익대 도예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들어간 후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한때 연극에 몰두하여 두 편의 주연을 맡았을 정도여서 도자와 연극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연극은 좋아했지만 개성이 강한 그는 단원들과 함께 몰려 다녀야 만하는 집단생활이 싫어 이마저도 그만두었다. 군에 자원한 그는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에게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도자사에 대한 공부를 집중적으로 할 수 있었고 그 와중에 분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오늘날까지 분청작업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 당시 수시로 드나들던 중앙박물관에서 우리나라 도자 예술에 선각자 역할을 하였으며,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선생을 만나게 되는데, 최순우 선생은 오늘날까지 그가 분청작업을 흔들림 없이 지속하게 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가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작업의 방향을 잡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974년 문화공보부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부터이다. 당초 목적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붙들려 간 한국 도공들의 자취를 알아보고, 그 곳의 개인 공방에서 일년쯤 수업하면서 그들의 실태와 가마 운영법 및 작업하는 태도를 견학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 곳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나름대로의 방향을 잡아 볼까 하고,3년 예정으로 갔으나 1년도 채 못 되어 돌아왔다. 그곳에서 작업하는 일본·독일·프랑스·미국의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그들이 만들어 내는 도자들이 한결같이 일본화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기 위해서는 아마추어가 아닌 철저히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생각은 집단적으로 권력적인 힘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만남 속에 자율적인 정신과 여유를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 때부터 그는 도자에 대한 내적 탐구의 깊이를 더해갔다, 특히 분청이 불교의 종파인 선종과 관계가 있음을 깨닫고, 무념무상의 자율성을 자신의 도예형상에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선종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교종에 대립하여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에 도달하려는 불교의 한 종파인데, 이러한 자유로운 선종의 정신을 형상으로 표현하기위해 그는 참선하고 차를 즐겨 마신 후 작업을 시작한다. 1980년대 후반은 그의 작업에서 큰 전환기였다, 그동안 즐겨 사용하건 물레에서 벗어나 석고틀이나 판 작업 그리고 코일링기법을 이용하여 보다 다채로운 기형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석고틀에 의한 작업은 그 한계성을 깨닫고 지금은 판성형과 코일링 만으로 작업 하고 있다. 1987년 이후 4년 만에 가진 1991년 개인전에는 다양하고 자유스러운 작업들이 등장하였다. 아무렇게나 빚은 듯한 자연스러운 형태가 오히려 편안함을 주고 있는 작품들이다. 또한 넓적하고 길쭉한 그릇 표면에 지푸라기나 나무조각, 손가락 등을 이용하여 나무, 풀, 바람 들 자연을 이미지화하여 속도감 있고 즉흥적으로 긁어냄으로써 기형과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윤광조의 도자예술의 특징은 전통 도자를 현대적으로 변형을 시도하고 있으면서도 도자가 갖는 고유한 속성인 실용성과 기능성을 잃지 않고 있다. 당시 우리 도자계의 분위기는 실용의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순수 미술로 전환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는 이에 동요하지 않고, 그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생활 용기전을 열었다. 여기에 출품된 작품들은 모두 어떤 특별한 용도를 갖고 있기 보다는 여러 용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여유와 넉넉함을 갖고 있다. 여유 있어 보이는 접시들, 그리고 무엇을 담아도 좋을 넉넉한 모습과 손에 잡기 편한 바리, 꽃병이 주를 이룬다. 최근 작품들은 삼각형 모양의 빈 공간을 두어 언제든지 실용적인 용기로서 사용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도자는 회화작품들과는 달리 한번 작업이 시작되면 흙이 말라 가는 과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작업을 진행해야하는 제약이 따른다. 또 실수나 결함이 곧바로 드러나지 않고 건조되는 과정에서 숨김없이 소홀함이 들어나기에 물감을 긁어내고 덧바르고 무한정 반복하여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얻어낼 수 있는 회화와는 다르다. 제작하는 동안 흙과 끊임없이 조우하며 흙의 속성과 작가의 의지를 결합시켜 적절한 타협점을 찾으며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자연에 순응하고 타협의 과정을 거쳐야만 작품이 자연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고 친근감이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자연을 인간에 대립하는 관계로 바라보며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서구의 정신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자연과 인간을 구별하지 않고, 그 속에서 동화되기를 염원하며 자연에 순응하려는 심리가 저변에 깔려 있다. 윤광조의 작품은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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