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國 陶 磁 文 化 史 略)3.백자문화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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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문화시대 (조선시대초기~조선시대말기) 1)朝鮮白磁의 意味와 司饔院 分院 대부분 고려는 청자, 조선은 백자라고 하며, 불교(佛敎)의 색(色)은 청자, 유교(儒敎)의 색은 백자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도자(陶磁)의 색(色)은 왕조나 사상과 인과관계를 갖지 않는다. 고려시대 백자는 9세기부터 청자의 주변에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경기도 용인의 서리와 시흥 방산동 요지 등에서 완전한 백자의 바로 전단계가 이미 활발하게 제작되었고 12세기가 되면 강진과 부안 요지에서 청자에 뒤지지 않는 높은 수준의 백자가 일부 제작되고 있었다. 14세기후반에 경기도 안양 관악산과 강원도 양구 방산 요지에서 발견된 백자는 조선백자로 이행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주류이며 대표성은 청자에 있기 때문에 이 시대를 청자문화시대라고 부르고, 뒤이은 조선시대는 백자문화시대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청자가 백자로 전환되는 시점은 14세기중기이며 우리의 경우는 15세기초기에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때 백자는 강도(强度)가 높고 완전한 자기질(磁器質) 경질백자로 품질이 크게 향상되었고, 이어 청화(靑畵)안료로 선명한 문양을 그려 넣은 청화백자가 등장하면서 짧은 시간안에 모든 도자기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실 청자에서 백자로 전환은 더 순수한 재료, 더 높은 기술, 더 견고하고 청결하며 실용적인 도자를 만드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더구나 청화를 포함하여 다양한 채색(彩色)으로 문양장식을 할 경우 백색 바탕의 백자가 가장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의 백자문화는 왕실의 중심인 높은 곳에서 시작하여 점차 아래로 확산되어 갔다. 고려시대부터 청자 주변에서 명맥을 이어 온 연질백자 계통은 14세기와 15세기초기까지도 일부 지방에서 제작되고 있었으나, 중국식 경질백자 기술이 도입되면서 새로운 차원의 고급백자가 15세기초기부터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세종 7년(1425)에 조선에 온 명(明)의 사신 윤봉(尹鳳)이 황제(洪熙帝)의 명을 따라 다량의 백자를 요구하자 광주에서 정성드려 만들어(精細燔造) 보낸 사실이 있는데, 이 내용은 1425년경 조선의 기술이 중국 황실용 백자에 뒤지지 않을 만큼 높은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齋叢話)?에 지적되어 있듯이, 세종 때(1418~1450)부터 어기(御器)를 백자로 바꾸어 쓸 수 있었던 것도 이와같이 우수한 백자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 고급백자 기술은 경기도 광주에서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정몽주의 학풍을 계승하고 영남지방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던 김숙자(金淑滋)가 경상도 고령현감을 지낼 때(1442~1447), 사기장(沙器匠, 陶工)들에게 구절지법(九節之法; 백토를 精選 練土하는 아홉가지 법)을 가르쳐서 광주?남원보다 좋은 백자를 공물(貢物)로 바치고 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김숙자는 지방관의 중요한 임무인 공물(백자)을 만드는 일에 깊이 관여했고, 자신이 직접 새로운 제작기술까지 익혀 장인들을 가르키고 독려했다는 내용이다. 또 1445년에는 대장군 김종서(金宗瑞)가 고령에서 백자를 보고 ?귀 현의 사기(백자)가 매우 아름답고 또 아름답다(貴縣砂器甚善甚善 言之再三)?라고 감탄했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좋은 백자를 만들기 위한 지도층들의 관심이 아주 깊고 또 품질에 대한 감식안도 매우 높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다. 이렇게 광주?고령?남원(상주를 포함하여) 등에서 공납한 고급백자는 대전(大殿)은 물론 궁중의 행사나 하사품 및 외국사신의 영접 등에 폭 넓게 쓰이면서 점차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백자의 안정된 공급을 위해 1420년대부터 고급백자 생산지로 알려져 경기도 광주 지역에 사옹원(司饔院) 소속의 분원(分院) 백자번조소(白磁燔造所)를 설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관요(官窯)는 왕실과 중앙관청을 주요 소비처로 하고 전국의 고급 기술인력과 원료를 독점하여 국내 유일의 최고 최대 규모의 백자생산지로 등장하여 조선왕조의 마지막 단계까지 지속되다가 1883년 민간에게 이양되었다. 2)靑畵白磁와 鐵畵?辰砂白磁 조선 청화백자의 모델이었던 중국 경덕진요(景德鎭窯) 청화백자는 이미 고려말부터 조금씩 전래되기 시작하여 세종조에 오면 수량도 많아지고 규모도 커지고 있었다. 조선에서 중국 청화기법을 익혀서 직접 제작하기 시작된 시기를 분명히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1460년대에 중국으로부터 청화안료 구입이 어려워서 국산 청화 개발을 서둘렀던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세종년간에 수입 청화로 청화백자를 시작하였고 늦어도 세조년간(1455~1468) 초반부터 청화백자 제작에 큰 힘을 기울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생각된다. 특히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세조 때 백자와 청화백자를 같이 썼는데 중국에서 회회청을 구하여 그림을 그리니 중국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한 기록은, 당시 조선 청화백자 제작 수준이 중국에 뒤지지 않을만큼 높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조선은 백자 장식을 위해 청화와 철화(鐵畵)?진사(辰砂)기법과 같은 고화도(高火度) 유하채(釉下彩)만 사용하고 있으며, 화려한 저화도(低火度) 유상채(釉上彩) 장식은 한번도 시도한 적이 없다. 유하채 가운데서도 분원(分院)에서 주로 쓴 것은 청화였다. 물론 청화가 다른 안료들과 달리 절대적 관심을 끌게 된 원인은, 청화의 시문 효과가 뛰어나고 고급백자에 어울리는 고급안료라는 점에 있다. 더구나 철화나 진사의 경우 발색의 정도가 불안정해서 일정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특히 색채 자체가 백자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임진왜란 후 왕실 연회에서 쓸 청화백자항아리를 구하지 못해 소문백자 위에 임시방편으로 가화(假畵)를 그려 썼는데, 그림이 쉽게 벗겨짐에따라 부득이 철화(石間?)로 그림을 그리고 구워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을 보면 청화안료가 없을 때에도 철화로 그려서 쓸 의도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미적(美的) 기준에는 백색 바탕에 검붉은 색의 철화가 어울리지 않는 색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더구나 붉은 진사의 경우 철화보다 더 기준에서 멀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청화안료로 일관하고 있던 조선백자에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18세기에 일반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사무역(私貿易)을 통해 들어 온 중국과 일본의 다채색(多彩色)백자가 유행하면서 부분적으로 시작 되었다. 특히 19세기에 관요백자의 일각에서 유행하였던 청화와 철화?진사를 같이 쓰는 다채색 기법과 청화나 진사 안료를 전면에 바르는 기법, 그리고 부조(浮彫)와 같은 양각기법 등이 서로 어울려 다양한 장식효과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들은 수입된 다채색백자가 끼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중국과 일본처럼 손쉽고 화려한 색채를 마음껏 구사할 수 있는 저화도 유상채를 사용하지 않고 고난도의 유하채기법을 써서 진중한 색채를 끝까지 유지하였다. 이러한 일관된 제작 경향은 자연의 본질을 감추거나 외곡시키지 않고 내재되어 있는 미적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지적엘리트들의 입장이 작용한 결과였다. 3)朝鮮白磁의 主體와 名分 조선은 중앙집권적 관료사회이자 엄격한 계급사회였다. 따라서 도자기를 쓰는 데에도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최고의 재료와 기술로 만들고 내화갑발(耐火匣鉢) 안에 넣어 구워낸 상품(上品) 갑번(匣燔)백자는 왕실 전용의 최고급 백자로서 후계자인 세자(世子)도 쓰지 못하게 엄격하게 제한된 특별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사대부를 대상으로 하품(下品) 상번(常燔)백자가 허용된 때가 17세기초기이며, 일반서민들에게는 18세기에 와서 허용되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백자의 주체가 왕실 중심의 중앙관청을 포함하는 사회지도층이라는 말이 된다. 조선백자가 독자적이며 일관성을 갖을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조형의 주체가 되는 사회 지도층의 미의식(美意識)과 의지(意志)에 있었다. 백자를 만드는 기능적인 일은 사기장(沙器匠)에게 전담되어 있지만 품질과 형태 등 조형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까지 완전히 그들에게 맡겨져 있던 것은 아니다. 실제 백자 제작의 주체이며 소비의 주체, 그리고 조형을 결정하는 주체는 성리학적 교양과 감성을 갖춘 사회지도층인 지적(知的)엘리트들이었다. 조선의 엘리트들이 이러한 백자의 독자성을 지지하고 지속시켰던 경위에는 그들 나름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개국 초기에 수립된 새로운 통치이념과 정연한 질서의식을 이상으로 하고 이것을 엄격하게 계승하는 것이 지식인으로 격조와 품위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치를 배격하고 절제와 지조를 근본으로 정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을 닦는 엘리트들의 당연한 입장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명분이 백자 조형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한쪽으로 근검?절약의 명분을 높이면서 다른 한쪽으로 실리를 취하기 위해 호화롭게 장식한 백자를 만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 그대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장식을 하는 것보다 본질을 더 중요시하며 원칙을 지키는 것 만이 지식인으로서 지켜야만 할 규범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강력한 주체의식은 문화전반에서 뿐만아니라 조선백자의 전체 흐름에도 같은 방향으로 나타났다. 특히 17세기 중엽이후에는 중국에 이어 일본도 화려한 유상채(釉上彩) 기법과 제작기술 전반을 혁신하고 전세계를 대상으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 때에도 조선은 개국초기 15세기 백자의 조형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세계도자의 경향이 귀족 취향의 호화스러운 디자인으로 장식된 다채색 백자 중심으로 변화되는 가운데, 오직 조선백자만 백색 바탕에 고화도 유하채로 간결하게 문양을 넣은 청화백자로 일관하고 있었던 것은 세계도자의 역사에서 특기할만한 예외적인 사건이다. 조선의 지적 엘리트들은 원래 백자가 갖고 있는 미적 본질을 자신들이 유일하게 계승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도자문화의 특징 한국도자문화에 관해 말할 때, 도자에 대한 인식 방향과 입장에 따라 각각 다양한 표현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조선백자의 전개과정을 몇백년이 지난 후 근대 산업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과 일본과 유럽을 포함하는 세계도자의 경향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던 조선백자의 17세기와 18?19세기를 제작기반의 쇠퇴와 기술적 낙후로 인하여 세계의 중심에서 탈락되는 과정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마 19세기후반에 근대적 도자산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일본과 유럽이 조선백자에서 민예적이며 소박함과 가공되지 않은 자연적(自然的)인 미(美)라는 것을 찾아낸 경위도 바로 산업화의 입장에서 조선백자의 비산업화를 바라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표현들이 본래 조선백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민예적이나 소박함 등의 비산업화를 상징하는 표현들은 근대 산업사회의 입장에서 조선백자를 바라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백자는 원료가 정제된 고품위의 재질과 고화도 환원염 번조로 완벽한 경질백자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기술적으로 인공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소위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미(美)라는 표현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기종은 단순 간결하고, 장식적 요소를 가능한 생략하여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준수한 형태를 기준으로 하고, 순백색 바탕을 존중하되 꼭 필요한 경우 청결을 상징하는 푸른색 안료로 함축된 정신세계를 절제(節制)의 과정을 통하여 표현하는 정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었다. 드믄 경우이지만, 청화안료 외에 다른 색을 사용할 때에도, 손쉬운 저화도 유상채를 쓰지 않고 고난도의 고화도 유하채를 사용하여 표면적인 화려한 색채 보다 내면의 진중한 색을 이끌어 내려 했는데, 아마 이러한 고품위에 대한 자부심이 화려한 디자인으로 장식된 중국과 일본과 유럽세계가 지향했던 중상주의(重商主義)적 도자관(陶磁觀)과 달리 조선 독자의 도덕주의(道德主義)적 도자관를 형성하게 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 서면, 우리나라 도자문화가 한결 새로워진다.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나는 현상은, 주변국가와 비교할 때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에 관심을 갖기보다 그릇의 재질과 본질적 기능에 더 치중하였다는 점이 더 눈에 띤다. 장식을 할 경우 최소한의 표현으로 물질이 갖는 고유의 성질을 외곡시키지 않고 절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으며, 그 표현 방법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공동체의 보편적 감성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함축적 표현(마치 기호와 같은)을 씀으로써 도자문화에서 도덕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드믈게 장식적인 부장품이나 다른 특수한 용도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보다 그것을 자신들의 감성으로 재구성하고 간결하게 표현하여 공동체와 공감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공동체와의 공감대, 간결하게 재구성하는 경향은 신석기시대는 물론 그 이후 고려?조선시대에도 항상 작용하고 있었던 조형의 원리였다. 우리나라 도자에 나타나는 본질을 중시하며 간결하게 절제된 표현의 정신은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온 물질 자체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유교적 검소?검약의 사상을 인간이 만들어내는 물질문명에 담음으로써 자연에 대한 아낌과 존중의 도덕적 정신을 구체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지나친 장식과 기교에 관심두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을 고전적으로 표현(본래의 것으로 되돌아 가려는)하는 경향으로 나타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에서도 여러번 지적했듯이 이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적극적 의지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세계적 유행이 표면적 장식과 호화스러운 상품으로서 중상주의를 향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물질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활용하여 백자 내면의 미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신중하고 겸손하게 표현하려 했던 우리 도자문화의 도덕주의적 입장이 오히려 더 높이 평가될 것으로 생각한다. * 참고 : 한국의 도자문화는 19세기말기를 기준으로 하여 근?현대와 구분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특히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기 사이에 고대로부터 계승되어 온 도자문화의 전통이 혼란(단절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글의 대상을 고대부터 19세기말기까지로 제한하였다. 근?현대 한국의 도자문화는 필자의 글, ?전통도자의 명암, 그리고 이상?,?한국전통도자전?(장소: 광주조선관요박물관)을 참고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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