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國 陶 磁 文 化 史 略)2.청자문화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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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문화시대 (통일신라시대후기~조선시대초기) 1)靑磁 發生과 그 意味 세계도자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자기질(磁器質) 청자를 만들기 시작한 나라는 중국이었다. 남북조시대(4-5세기)를 거쳐 당(618~907년)초기가 되어서 비로서 청자에 가까운 수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 청자는 특수한 용도에 제한되어 중국사회에 폭 넓게 확산되지 못했고 주변국가에 영향도 적은 편이었다. 본격적인 고급화와 확산의 시기는 중앙집권적 귀족사회를 해체시키고 지방분권화의 계기가 된 안록산의 난(755년) 이후부터이며, 이 때부터 일상용품에서 청자의 비중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천연 소재를 단순 가공했던 소박한 공예에서 매장량이 무한하며 염가인 원료(粘土)를 고차원의 과학기술로 가공한, 소위 고부가가치(高附加價値) 공예(工藝)가 인류사회에 등장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청자의 영향을 자체 생산으로 연결시켜 독자적 문화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었다. 통일신라후기부터 서해안과 남해안 각 지역을 중심으로 등장한 새로운 지도층들은 신발명품인 중국 청자를 수입해 쓰면서 그의 뛰어난 아름다움과 실용성 및 산업성 등 여러 장점들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먼저 이해할 수 있었고, 이어서 자체 생산하려는 집념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드디어 9세기경, 청자에 관심을 갖고 있던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중국청자를 대표하는 절강성(浙江省) 월주요(越州窯)의 기술진을 제각기 영입하여 전국 15개지역에 마치 우후죽순처럼 청자가마들을 앞 다투듯 세우고 이어서 제작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중국이 2000년동안 완성한 청자를 불과 1세기만에, 그것도 한국 전역에 산포하여 있는 십수개소의 청자요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 낸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2)翡色 釉藥과 裝飾技法의 多樣化 우리나라 청자는 중국 기술진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계속 중국의 뒤만 따라가고 그 수준에 만족하고 있었다면 아류나 모방품이라는 불명예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상감(象嵌)청자나 진사(辰砂)청자와 같이 독창적 의지가 필요한 새로운 발명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청자는 9세기 발생기를 지나 10세기 초기청자의 단계에서 이미 중국과 다른 한국적 조형과 소위 비색에는 못미치는 조금 진한 유약이지만 맑고 투명한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중국청자는 유약이 탁하고 불투명하거나 아니면 유약이 두꺼워 자연히 진한 색으로 되어 태토(胎土) 표면의 질감이 잘 나타나지 않는 성질이 있다. 따라서 문양과 장식 효과를 내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장식을 따로 붙이거나 요철을 강하게 하거나 형태를 과장해 만들어야만 한다. 그 반면, 한국의 비색 유약은 점차 맑고 거의 투명하게 되는데(미세한 기포에 의해 약간 반투명한 경우를 포함하여), 이 경우 태토면의 질감이 아주 예민하게 나타나며 장식 효과도 예상보다 높아진다. 당연히 한국은 문양과 장식을 간결하고 과장이 없는 절제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청자가 우아하고 세련된 조형을 완성하게 된 데에는 이렇한 개성적인 유약의 상태가 절대 조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청자의 시문(施文)기법은 중국 각지의 특징적인 기법들을 한국의 대표적 청자요(靑磁窯)인 전남 강진요(窯에) 모두 모아서 통합과 조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기법으로 탄생되었다. 특히 투명한 유약층 밑에 시문(施文)하기 때문에 중국의 강열한 기법을 순화시키면서 다양하게 응용하였는데, 요철이 낮은 양각과 부드러운 음각과 조화, 철화(鐵畵)와 선각(線刻), 흑백을 자유자재로 쓰는 퇴화(堆花) 등 종류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한국청자의 상징인 상감(象嵌)기법도 이러한 통합과 조화의 과정에서 태어나고 발전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으며, 마찮가지로, 유하채(釉下彩)로 산화동(酸化銅)을 쓰고 환원염 번조에서 붉은 색으로 발색되는 진사(辰砂)기법를 창안한 것도 맑고 투명한 유약이라는 전제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환원염 번조법에 의한 비색청자가 크게 발전하는 한편, 산화염 번조법을 써서 구어낸 철화청자가 등장하고 있었다. 이 철화문이 그려진 청자는, 비색청자가 문양의 구성이나 소재?표현기법 등에서 고려적 세련미를 보인 것과는 달리, 중국 자주요식의 문양기법을 응용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주 대담하고 활달한 문양을 구사하여 독자적 조형으로 완성된 것이다. 한국의 청자문화가 중국의 기법에 대한 응용과 끈임없는 새로운 시도와 탐구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렇게 다양한 시문기법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3)靑磁의 展開와 特徵 이러한 다양한 기법들은 문양을 넣지 않은 소문(素文)의 시대인 청자의 발생기?발전기를 거쳐 세련기인 11세기부터 12세기사이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음각?양각기법이 세련되는 시기도 이 때이며, 철화기법이 독자적 특징을 나타내면서 퇴화기법이 시작하는 때도 세련기의 전반인 11세기이다. 상감기법이 처음 개발된 때는 10세기후반이지만 12세기전기에는 기법적으로 숙련되어 높은 수준의 표현을 할 단계에 와 있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진사기법도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상감기법은 10세기후반의 요지출토품 가운데서 아주 드믈게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기법 자체의 난이도가 높아서 청자의 전반적인 제작기술이 정점에 오르는 12세기까지 잠재해 있었다고 생각된다. 비색청자의 전성기에 새로운 장식기법을 탐색하고 있던 고려인들에게 상감기법의 존재는 새로운 방향으로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 상감기법이 유행하면서 청자의 조형에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유층(釉層)이 조금 얇고 투명해지며, 입체적 조형보다 평면적 문양에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12세기전기까지 유행했던 고전적이며 우아한 국화나 모란을 사실적으로 그린 연속문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버들과 갈대가 있는 연못의 풍경이나 구름과 학, 포도덩쿨에 올라 희롱하고 있는 어린이 등을 회화적이면서 시적(詩的)인 장면을 묘사하는 문양으로 변화되어 갔다. 신의 손길, 또는 하늘의 혜택이라고 말하는 우리 청자에 대한 무한한 찬사와 동경은 현대인의 표현뿐만 아니다. 이미 청자를 제작하던 당시 사람들도 높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의 대표적 시인 이규보(李奎報)는, 아름다운 청자는 열에서 골라 하나를 얻을(揀選十取一)만큼 어렵다고 하며, 그 솜씨는 마치 하늘의 조화를 빌린 것(似借天工術)이라고 하면서 청자의 완성미(完成美를) 설명하고 있다. 송(宋)시대 『수중금(袖中錦)』(12세기전기)에 기록된 천하 명품들 가운데 백자는 중국 정요(定窯)백자, 청자는 고려의 비색청자가 천하제일이라는 내용이 있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徑)』(1124년)에도, 색상이 아름다워 고려인 스스로 비색(翡色)이라고 부른다거나 청자사자향로를 가르켜 비색으로 가장 정교(最精絶)하다는 표현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당시 중국상류사회에서 고려 비색청자에 대한 무한한 동경의 풍조를 증언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4)象嵌靑磁에서 粉靑沙器로 특수한 생활용품의 경우 입체적 조형미를 추구하던 비색청자시대와 평면적 장식미를 추구하던 상감청자시대를 지나면서 청자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깊어지고 확대되는 한편 현실적 기능도 긍정적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후기는 오랜 몽고의 침입(1231~1259)과 간섭을 받는 등 사회전반에 걸쳐 현실적 상황에 대한 이제까지와는 다른 인식이 요구되었던 절박한 시기였다. 이 때 청자에 대한 관심이 두가지 경향으로 나뉘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는 유태(釉胎, 유약과 태토)의 질이 퇴보하면서 오히려 장식을 복잡하고 다양하게 넣어 질적 결함을 보충하려는 경향인데, 예컨대 주변 문양대가 넓어지고 다시 이것을 세분하여 전체를 복잡하고 꽉차게 상감으로 새겨 넣음으로서 외관을 호화스럽게 장식한 것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문양 요소들을 양식화하고 규격화시켜 마치 연속문양처럼 반복적인 배치를 한 것인데, 이러한 경향은 상감청자의 질이 떨어지면서 다량생산과 실용화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말기 14세기가 되면 상감청자는 더 이상 귀족적으로 우아하다거나 세련됨과는 다른 방향으로 제작되고 있었다. 소량의 정예품 생산에서 다량생산으로 목표를 변경하면서 전반적으로 조질화되며 유태색은 짙은 암갈색으로 변하고 문양은 간략해지거나 밀도가 낮아지는 등 막그릇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다량생산과 조질화의 경향은 왕조가 교체되면서 일단락 되고 있었다. 새로운 조선정부의 개혁적 정책에 따라 사회제도가 안정되고 문물이 정비되면서 일상용기의 수준도 상승기류를 타서 짧은 기간안에 빠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14세기말기에 최악의 상태로 떨어졌던 고려 상감청자는 1420년대에 고려식과는 다른 재질과 조형, 장식기법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하는데, 바로 이것을 고려식 상감청자와 구분짓기 위하여 별도로 분청사기(粉靑沙器, 粉靑)라는 명칭을 붙였던 것이다. 분청은 태토와 유약, 장식기법을 포함한 모든 요소가 고려시대의 청자 계통에 속하지만, 형태와 문양을 표현하는 방식은 청자와 분명히 구분되고 있다. 무엇보다 문양을 넣을 때 백토(白土)를 쓰는 방법에 따라 크게 두가지 계통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먼저 상감(象嵌)분청계통의 경우 문양을 음각한 다음 상감하게 되는데, 처음 음각하는 방법에 따라 상감과 인화(印花) 분청으로 나뉜다. 다음 분장(粉粧)분청계통은 그릇 표면에 백토를 먼저 분장한 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긁어내거나 그위에 산화철로 문양을 그리는 박지(剝地)?조화(彫花)와 철화(鐵畵) 분청이 있으며, 백토를 분장한 상태 그대로 두는 귀얄?덤벙 분청도 여기 포함시킨다. 인화분청은 청자와는 다른 차원의 우수한 태토와 양질의 투명한 유약을 써서 더 견고하고 실용적으로 만들고 문양도 정성스럽게 새겨 넣은 것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일부는 국가에 공납(貢納)하거나 상층계급용으로 만든 것인데, 중앙관청이 직접 생산 관리를 감독하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볼 때 품질이 균등하여 눈에 쉽게 띌만한 지역적 특징은 나타나지 않는다. 분장분청계통에서도 일부 박지?조화?철화 분청을 제작하던 가마는 인화분청과 같이 중앙의 감독 아래 우수한 질을 생산하였으나, 그 외의 인화?박지?조화, 특히 귀얄?덤벙 분청을 만드는 작은 가마들은 상대적으로 질도 낮으며 전라도와 충청도에 제한되어 있어서 지방에 따라 특성화된 경향을 볼 수 있다. 5) 조선초기 粉靑과 白磁와의 관계 분청과 청자는 이어 받고 주는 관계에 있지만, 백자와는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놓여 있다. 분청이 청자의 기술과 조형적 전통을 계승한 보편적인 자기라면, 백자는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차원의 특화된 자기라고 할 수 있으며, 분청이 중앙관청과 사회지도층의 자기라면, 백자는 왕실의 중심에 있는 자기라고 할 수 있다. 구태여 구분하여 말한다면, 왕실은 오직 백자를, 중앙관청와 사회지도층은 하품(下品) 상백자(常白磁)와 인화?상감 분청계통을, 사회일반과 지방 수요에는 질이 낮은 상감분청과 분장분청계통의 그릇을 쓰는 것이 관행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점차 백자 수요가 확대됨에따라 중앙관청과 사회지도층은 분청을 버리고 백자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 변화의 직접원인은 전국에서 받아드리는 공납체제를 폐지하고 중앙관청에서 백자 생산과 관리를 전담하는 관요(官窯)체제로 바뀌면서 시작되었다. 즉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사옹원(司饔院) 소속의 분원(分院) 관요가 1467~14668년 사이에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것이다. 분원 설치 이전까지 중앙관청에서 필요한 도자기는 전국 각지에 분포하는 백여개소(분명히 알 수 없지만, 또는 수십여개소)의 분청요에서 엄격한 생산관리를 통해 제작된 인화분청을 공물(貢物)로 받아들여 사용해 왔다. 이 때의 분청(특히 주로 공납(貢納)용이던 인화분청)은 질이 뛰어나고 꼼꼼한 솜씨로 정교하게 만들어서 높은 품격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제작되고 있던 상감분청이나 조화?박지분청도 어느 정도 품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납체제을 폐지하고 중앙관청이 백자를 직접 생산하여 자급자족하게 되자 전국에서 공납으로 바치던 인화분청을 만들 필요가 없어지게 되고 자연히 중앙의 감독도 없어지게 되었다. 분청사기 생산은 결정적 타격을 입고 지방관청이나 지방민의 수요량 정도를 생산하는 체제로 대폭 축소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분청이 조선전기 15세기중기까지 질과 양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가 갑자기 질과 양이 곤두박질 치게 된 원인은 바로 분원의 설치와 백자의 대량생산에 있다. 대규모 소비자, 그것도 중앙의 소비자를 잃은 분청은 빠른 속도로 지방화 조질화되어 갔다. 물론 이러한 지방화 이전부터 특수한 지방 가마에서는 관례적인 규범을 깨뜨리고 기형과 문양에 이색적인 것이 많이 나타나서 분청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광주 무등산의 조화(彫花)분청과 공주 계룡산의 철화(鐵畵)분청은 기형과 문양의 활달함과 생략과 변형 및 빠른 속도감이 주는 경쾌한 표현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상태는 늦어도 16세기초기까지 지속되고 있었으나, 백자가 어느정도 확산되고 사회전반의 이해 높아지면서 겉모습만 백색으로 바꾸는 경향 나타났다. 물론 표면 전체에 귀얄기법이나 덤벙기법으로 백토를 발라서 백색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속살은 조잡한 분청이었다. 분청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 졌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수십년 전인 16세기후기에 대부분 소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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