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國 陶 磁 文 化 史 略)1.도기문화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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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國 陶 磁 文 化 史 略 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도자(陶磁)는 넓게 동아시아권에 속하면서 이웃나라와 우호적 교류를 통하여 후진성을 탈피하고 선진문화와 기술을 과감히 받아드려 새로운 것을 창조해 왔다. 특히 전통을 중요하게 보고 그것을 이어가면서 외국의 선진문화와 조화시켜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려는 끊임없는 계승과 개방의 자세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예컨대, 오래전부터 계승되어 온 전통적 조형에 중국 청자(靑磁)의 첨단기술을 조화시켜 뒤에 천하제일의 비색(翡色)청자를 완성한 일이나, 세계의 중심이 백자(白磁)로 바뀌자 선비 정신의 구현인 절제(節制)의 미의식(美意識)을 새로운 조선백자에 담아낸 일 등은, 바로 그러한 전통 계승의 정신과 개방과 조화의 국제감각을 유지함으로써 비롯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항상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세계 굴지의 도자문화 국가로 부동의 위치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도자의 전개는 보편적인 인간의 지혜와 과학기술의 발달과 같은 과정을 밟고 있다. 처음 신석기시대에는 800℃ 내외로 산화염번조(酸化焰燔造)한 연질토기(軟質土器)를 제작하다가, 청동기시대에는 청동(또는 황동)을 합금?주조할 수 있는 온도인 900~1000℃ 정도로 조금 더 단단한 토기를 만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마 구조를 개선하지 않은 채 온도를 높이기 위해 연료량을 증가시키면 불완전번조(不完全燔造, 不完全還元焰)가 되고 흑도(黑陶)라고하는 침탄기법(浸炭技法)의 흑색 도기가 만들어진다. 마치 돌을 깍아 만든 그릇과 같은 질감의 단단한 경질도기(硬質陶器)는 철기시대가 시작되면서 만들어졌다. 철(鐵)을 제련하고 주조하는 온도인 1,100℃의 용광로 기술과 함께 고화도(高火度) 환원염번조(還元焰燔造) 기술이 전해진 것이다. 고화도 번조가 시작되면서 인공적인 조작(불을 때는 도중에 재[灰]를 일으키거나, 일부 소금물을 뿌리는 등)을 통한 자연유(自然釉)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고, 이어서 인공적인 유약(釉藥)을 씌운 회유도(灰釉陶)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화도 환원염 계통의 회유도 단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자기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는데, 이러한 여건에서 중국의 청자 제작술이 전격적으로 전해졌고 이어 백자도 뒤따르게 된 것이다. 도기문화시대 (신석기시대~통일신라시대후기) 1)軟質陶器의 發生과 展開 한반도에서 인류의 역사는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다. 늦어도 50만년전부터 구석기인들은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 널리 퍼져 살면서 생활을 이어갔다. 신석기문화는 시베리아 남단에 흩어져 살던 고아시아족의 일부가 한반도로 이주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6000년경 신석기인들은 식량 자원이 풍부한 해안가나 큰 강가 주변에 자리잡고 생활했는데, 여기서 신석기시대를 가르키는 표식인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토기(土器는 clay ware를 일본식 한자로 표현한 용어이며, 중국은 陶器, 우리는 陶器와 瓦器를 혼용하였다)가 나타나고 있다. 토기와 마제석기는 신석기인들의 생활필수품이자 절대적 가치를 갖는 아주 소중한 물건이었다. 따라서 토기 등에는 더 실용적으로 만드려는 욕구 뿐만아니라, 더 아름답게 만들어 정신생활을 만족시키려는 소박한 목적이 담겨지게 된다. 1980년대 전기에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바닷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모래언덕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친 집터가 발굴되었다. 여기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문화층의 연대가 기원전 6000~5000년으로 측정되었는데, 토기의 경우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빗살문토기보다 더 앞 선 시기에 가는 점토(粘土)띠를 붙여 장식한 융기문(隆起文)토기가 존재했다는 분명한 근거가 발견된 것이다. 신석기시대 토기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눈다. 첫 단계는 기원전 6000~5000년부터 기원전 4000년까지 제작된 융기문토기 계통과 문양장식이 없는 선무문(先無文)토기이며, 둘째 단계는 기원전 4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동안 한반도 전역에 확산된 소위 빗살문토기이다. 셋째 단계는 기원전 2000년경 함경도지방을 통해 전해진 중국 신석기시대후기의 채도(彩陶) 기술로 만든 간단한 음각문을 새긴 홍도(紅陶) 등으로서, 이 즐문토기와 홍도 계통은 뒤이은 청동기시대의 무문(無文)토기에 흡수된다. 고조선과 함께 시작된 청동기시대(기원전 1000~300년)에는 단순화된 빗살문토기를 여전히 쓰면서 차차 무문토기로 변화되고 있었다. 신석기시대에는 태토(胎土)도 강하구나 해안가의 퇴적점토를 썼지만, 이 때부터 구릉지대의 가소성(可塑性) 높은 사질점토(砂質粘土)로 바뀌고 번조기술도 발전하여 전보다 더 단단하고 기능적이며 다양한 형태를 만들게 되었다. 이를테면, 특별히 정선된 태토로 성형하고 붉은 석간주(石間?)를 표면에 바르고 매끄럽게 문지른 후 산화염 번조한 홍도(紅陶)와, 불 때는 과정에 특수한 조작으로 그릇 표면의 일부를 흑색이나 녹청색으로 변화시켜 장식적 효과를 낸 가지문토기(彩陶라고도 함), 불완전 번조하여 탄소를 강제로 투입시킨 검은색 흑도(黑陶) 등이다. 이들은 부장품이나 특수한 용도를 위해 정성스럽게 만든 것인데, 이 때에 와서 안료를 바르거나 불 때는 방법을 조작하여 장식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만한 기술 수준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硬質陶器와 中國産 輸入 磁器 철기문화는 중국 동북지방에 위치한 연(燕: 기원전 323~222년)나라가 동쪽으로 이동해 오면서 요녕지방을 통해 한반도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철기문화와 함께 전국(戰國)?한(漢) 시대의 회도(灰陶) 기술이 전해져서 획기적인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물레라는 성형도구가 전해졌고, 기존의 윤적법(輪積法)에 새로운 타날법(打捏法)을 동시에 구사하여 독[甕]과 같은 큰 그릇을 만들게 되었으며, 본격적인 가마 축조(築造)기술을 써서 고화도 환원염 번조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에 성행하게 되는 소위 회청색경질도기(灰靑色硬質陶器)도 이 시기 후반에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오랜 전통의 저화도 산화염 연질도기 위에 새로운 고화도 환원염 경질도기가 등장하면서 기능과 용도에 따른 구분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조리용기나 허드레 그릇은 급열 급냉에 강하고 충격에 강한 연질도기로, 저장용 큰 독이나 음식기는 수분 흡수율이 낮으며 내구성이 강한 경질도기로 제작되면서 도기문화의 사회적 기능이 한 층 넓어지게 된 것이다. 요동과 한반도의 서북지역(고구려)과 중부 이남의 백제?가야?신라의 도기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고구려는 대부분 평저(平底)이며 표면을 연마하고 산화염과 환원염이 공존하는데, 환원염의 경우에도 남한지역에 비해 조금 낮은 온도로 구워 경도가 낮은 편이다. 그러나 남한지역은 고화도 환원염 번조로 회청색 경질도기가 보편적이며 드믈게 자연유(自然釉)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대형 그릇은 바닥이 둥근 원저(圓底)이며, 소형은 평저이거나 아니면 굽을 만들어 붙이는데, 고배(高杯)와 같이 높은 굽을 만들어 붙이는 형식은 북방 고구려 지역에 없는 남한의 특징이다. 고구려?백제의 멸망 이후 통일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각각 당(唐)과 우호적 교류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계문화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이 때 당 양식의 금은기(金銀器)와 목칠기(木漆器) 도금청동기(鍍金靑銅器) 등과 당에서 수입한 청자와 백자가 신라 귀족사회에 크게 유행하면서 신소재인 자기(磁器)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게 되었다. 후기신라의 도기는 당시 변화된 공예적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정교한 인화문(印花文)과 불탑(佛塔)을 상징하는 화장골호(火葬骨壺)가 별도 제작되며, 삼국시대 연유도(鉛釉陶) 기법을 계승한 연유골호(鉛釉骨壺)와 연유를 씌운 기와?와당?부조(浮彫)를 새긴 거대한 규모의 녹유사천왕전(綠釉四天王塼) 등이 제작되었다. 이들은 왕성과 귀족사회에 어울리는 특별한 용도의 인화문골호와 연유도로서 생산량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생산량에 있어서 주종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일상용기이다. 이 시대는 무덤에서 출토하는 도기가 아주 적은 반면, 생활유적에서 출토한 것이 거의 대부분으로 수량도 아주 많다. 가장 대표적 유적인 경주 안압지(雁鴨池)에서 출토한 수 많은 일상용기들은 삼국시대의 경질도기나 인화문골호 보다 낮은 온도에서 구워 밝은 회색을 띠고 있다. 표면에 새겨 넣던 선각과 인화문 장식이 생략되는 동시에 고분 부장품 성격의 고배(高杯)나 장경병(長頸甁) 등 의식적 요소가 사라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쓰는 음식기와 같은 형태들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이 형태들은 전통적인 것도 있지만, 당시 유행의 첨단에 있는 금속제 그릇과 당대 자기의 형태를 모방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후기신라시대의 도기문화는 귀족사회의 특수한 용도로 만든 골호(骨壺)와 연유도(鉛釉陶), 그리고 일반사회의 일상용기인 회색무문도기로 나뉘어져서 분명한 양극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회유도가 등장하게 된 것도 특기할만한 점이다. 이미 경주 주변의 도요지와 서남해안의 영암 구림리?해남 구성리?보령 진죽리 등 통일신라 후기양식의 도요지에서 양질 태토를 써서 별도 제작한 회유도기가 확인되어 있다. 물론 한국의 경우 회유도의 제작기간이 짧고, 또 곧이어 청자가 발생하여 회유도의 위치가 좁아졌기 때문에 도자문화 전반에 미친 영향은 비교적 적다. 당시 도자기 가운데 고급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자기질 청자와 백자는 중국 수입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중국자기 수입은 8~9세기에 대폭 증가하고 또 음식기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 기간에 한국사회는 고화도 환원염 번조기술이 보편화되어서 회유도를 생산할 수 있는 기반과 고급 공예품 수요자의 확산, 그리고 수입 중국자기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같은 자기문화 발생의 전제조건을 이미 완비하고 있었다. 이제 청자기술의 이전이라는 도화선만 당기면 되는데, 한반도에서 청자발생은 일촉즉발의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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