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의 도자기 교류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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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도자기 교류사 1. 선사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의 교류사 우리나라 도자사를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중국 도자사를 공부해야 한다. 그만큼 중국의 도자기가 한국 도자사의 발달에 미친 영향이 심원하다는 말이다. 중국 도자기가 한국에 끼친 영향은 신석기시대 말기 무렵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인 교류는 청동기시대 후기 즉 기원전 3-4세기 무렵부터이며, 앞서 이야기한 대로 한대(漢代)의 토기기술의 영향에 힘입은 결과, 종래의 무문토기 제작방식에서 벗어나 물레성형을 하여 밀폐된 실요(室窯)에서 높은 온도의 환원염으로 구운 회청색경질토기(灰靑色硬質土器)가 발생하게 된다. 이를 ‘제1차 토기혁명’이라 부른다. 이후 삼국시대에 들어 4-5세기 무렵에는 중국 남부의 월주요(越州窯)에서 생산된 청자-이를 고월자(古越磁)라 부른다-나 흑유자기들이 한반도에 유입되어 고분에서 출토되며 이의 영향으로 와질토기나 흑도에 중국식의 문양이 나타난다. 즉 어깨 부위에 사격자문(斜格字文)의 문양대를 장식하는 것이 유행하는데 이런 장식문양은 고월자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것으로 중국은 인화로, 한국은 음각으로 처리한 것이 다르다. 또한 백제지역에서는 고월자의 기형을 닮은 호자(虎子)나 벼루가 토기로 번안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삼국시대 말기인 6-7세기에는 백제나 신라 지역에 중국의 연유도(鉛釉陶) 기술이 도입되어 갈색이나 녹색의 연유를 씌운 시유도기들이 조금씩 나타나며 이 기술은 곧 일본에 전해졌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당(唐)과의 교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문화가 다방면으로 유입되어 통일신라 문화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 시기의 대표적인 토기인 인화문토기에도 기형이나 문양장식에 중국의 당삼채(唐三彩)의 영향이 뚜렷이 반영되며, 한편으로 역시 당삼채의 영향으로 보이는 연유도가 성행하여 다가올 자기 발생의 기술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 2. 자기의 탄생에서 고려말까지의 교류사 통일신라 말기가 되면 안압지 등의 유적에 중국제 자기들이 다량 출토하여 당시 중국 도자기와의 교류를 짐작케 하는데 이에 자극을 받아 9-10세기에 한반도에서도 드디어 고품질의 청자와 백자 등의 자기의 번조에 성공하였다. 우리나라 자기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중국 남부의 월주요인데, 월주요는 당 후기의 청자가마로 유명하며 이곳에서 생산된 청자들이 중국 각지는 물론이고 한국?일본?동남아시아?중동?이집트까지 출토될 만큼 그 영향력이 대단하였다. 그런데 이 초창기의 국내 가마터를 조사해 보면 중국식의 벽돌가마가 먼저 만들어지고 한국식의 진흙가마는 이후에 나오는데, 이를 보아 최초의 자기 번조에는 중국 장인들이 직접 와서 가마를 짓고 청자나 백자를 생산하였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일단 자기의 번조에 성공한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에 들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데 고려 전반의 11세기까지 중국 각지의 이름난 가마들의 영향을 받아 들였다. 월주요의 영향은 계속되어 오대(五代)와 북송초기의 청자류에 성행한 음각 문양들이 고려청자에 나타나며, 북방의 섬서성 요주요(耀州窯) 청자의 영향을 받은 양인각 수법의 문양장식, 하북성의 정요(定窯)백자, 강소성 경덕진요(景德鎭窯)의 청백자류, 하북성 자주요(磁州窯) 등에서 기형이나 장식기법, 문양소재 등을 받아 들였다. 특히 정요백자는 북송 때 기록인 유명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고려자기들이 정요기(定窯器)를 방하였는다는 내용이 있어 이번 전시에서 정요와의 관계에 좀 더 비중을 두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고려청자는 마침내 12세기에 들어 비색청자를 완성하여 천하제일의 명성을 얻게 되며 곧 이어 고려 독창적인 상감청자가 발달하는데 이 기간 즉 12- 13세기에는 중국의 영향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13세기 후반에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어 원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지만, 처음에는 원 도자기의 영향은 별로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경덕진 등의 청화백자에 성행하는 문양장식 중에 고려청자에서 유행하였던 장식요소가 보여 눈길을 끈다. 특히 매병 등의 어깨를 장식한 커다란 여의두문대(如意頭文帶)나 동체 중간에 화창(花窓)을 설정하고 그 속에 문양을 베푸는 수법 등은 고려청자에 매우 유행한 장식법이고 중국에서는 이전까지 자주요에 간간이 사용된 외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어서 고려청자가 이때에 와서 원대 도자기에 거꾸로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14세기의 고려 후기 내지 말기청자에는 역시 원대 도자기의 문양패턴이나 문양소재, 기형 등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며 이 요소들은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나 백자에 이어진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청자, 분청사기에 편구발, 마상배 같은 신 기형이 보이며 대접류도 양감이 좋고 구연이 외반하는 형태의 것이 나타나며, 매병의 입도 반구형(盤口形)에서 나팔형으로 변한다. 3. 조선시대의 교류사 조선시대들면 조선백자의 성립에 원말명초(元末明初)의 백자 기술이나 조형감이 영향을 미쳤다. 먼저 경덕진에서 원대에 완성을 본 소위 ‘추부백자(樞府白磁)’의 영향으로 조선에서도 국초부터 순백색의 경질백자를 만들게 되고 대접이나 항아리 등의 조형에 이들의 형태적 특징이 반영된다. 다음으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청화백자의 발생이다. 14세기 중엽 경에 경덕진에서 청화백자의 번조에 성공하자 이 새로운 아름다움에 세계가 경탄하며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당연히 국내에서 청화백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 늦어도 15세기 중엽 경에는 번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경기도 광주의 도마리 가마터에서 청화백자의 발생시기에 모델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제의 청화백자편들이 출토하고 있어 당시의 사정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초기의 청화백자는 기형이나 문양이 원말명초 청화백자와 상당히 유사하여 일견하여 중국풍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곧 국풍화되면서 기형이나 문양이 조선적인 분위기로 변하게 되는 것도 흥미롭다. 이후 조선백자의 전개에 특별한 중국의 영향이 보이지 않으며 이런 상태는 18세기까지 계속된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중국에서는 1644년에 만주족이 명을 멸하고 새로운 청조(淸朝)를 세웠는데, 조선 조정은 청을 ‘야만’이라 규정하고 소위 ‘조선중화주의’를 제창하면서 호란(胡亂)을 자초하였고 자연히 청과의 교류는 단절되었다. 도자기에도 중국의 영향이 전혀 없이 자체적인 백자문화를 일구어 독특한 조선적인 미감의 도자 세계를 펼쳤는데, 이런 상황은 새로운 정치관을 가진 정조(正祖; 1776-1800)가 청조의 문물을 다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18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그래서 18세기 후반부터 청의 자기문화가 조선에 유입되어 기형과 문양장식 등에 그 영향이 보이지만 전 시기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특히 기술적으로 당시 세계도자사의 주된 흐름이었던 상회(上繪)자기의 제작을 외면하고 순백자와 청화백자의 생산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큰 변화는 이루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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