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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교류사
  • 작성자한국도자재단
  • 등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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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교류사

 

 

 

1. 선사에서 고대까지의 교류사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교류사는 7, 8천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에 이미 일본유적에서 한반도의 융기문토기가 출토하고 우리나라 부산의 동삼동 패총에서는 일본의 죠몽(繩文)토기가 출토되어 한.일 양국간의 도자기 교류사를 입증하고 있다. 이후에도 신석기시대의 전기 압인문토기와 중기의 수가리식토기 등이 일본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어서 야요이(彌生)시대가 되면 한반도의 영향이 급증하여 청동기.철기.벼농사가 전파되며 이와 함께 무문토기가 들어간다. 무문토기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중기의 특징적인 송국리식 토기와 단도마연(丹塗磨硏) 토기인 홍도(紅陶)가 일본 야요이 시대 유적에서 출토하며, 이중 홍도는 기형과 장식기법에 영향을 주어 일본에 이를 모방한 새로운 기종이 나타난다. 또한 무문토기 후기의 점토대토기도 일본의 유적에서 출토하지만 일본 토기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도자기가 일본 도자사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소위 ‘스에끼(須惠器)’의 발생일 것이다. 앞서 한국은 중국의 영향으로 ‘제1차 토기혁명’이라 불리는 획기적인 회청색경질토기를 만들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는데, 삼국시대 4세기 무렵부터 크게 성행한 이 토기문화가 4세기말이나 5세기초에 일본에 그대로 전파되어 가히 혁명적이라 할 스에끼가 발생하였다. 이 스에끼야 말로 이후 일본 도자사의 모태가 되는 것으로, 교요(?窯)라 부르는 가마를 짓고, 장석을 다량 함유한 내화도가 높은 점토를 골라, 물레를 사용해 성형한 그릇을, 1000도가 넘는 고화도에서, 환원염으로 소성하였다.

이 새로운 기술로 만든 스에끼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인들에 의해 전해졌다고 하며, 오사카 지역의 쓰에무라(陶邑) 고요지군(古窯址群)에서 시작하여 각지로 퍼졌나간 것으로 보아왔지만, 최근에는 여러 지역에서 초기 가마들이 발견되어 다원적인 발생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스에끼는 샤프한 조형과 단단한 재질을 갖추고 있어 일본에서는 이를 토기가 아니고 석기(석器, stone ware)라 분류하고 있으며, 이들은 삼국시대의 가야.신라.백제토기의 기형을 골고루 본 뜨고 있지만, 크게 보면 가야계의 기술이 기본이 되고 백제계의 요소도 농후하며 특히 쓰에무라에서는 신라계의 영향도 보인다.

다음으로 7세기 후반 무렵에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유약을 바른 도기가 출현한다. 연(鉛)을 매용제로 하여 비교적 저화도에서 장석을 녹여서 얻은 연유인데 동(銅)을 가하여 녹색의 발색을 보이는 녹유도가 나타난다. 이 녹유도의 존재는 곧 이어 당삼채의 영향으로 나타나는 소위 ‘나라삼채(奈良三彩)’의 기술적 바탕이 되지만, 이 삼채도기의 출현 이전에 보이는 녹유도는 한국에서 기술을 도입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나라(奈良), 헤이안(平安)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도자기는 주로 중국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발전하며 9세기 무렵에는 우리와 같이 월주요 청자의 영향을 받지만 청자 번조의 성공까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회유도의 수준에 머문다. 이 상황은 거의 16세기 말 까지 지속되며, 이런 가운데 일본 귀족층들은 중국과 한국에서 청자나 백자 등의 고급자기를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며, 이런 수입자기를 모델로 한 회유도의 생산도 이루어졌다. 특히 가마꾸라(鎌倉) 시대가 열리면서 세토요(瀨戶窯)에서 이런 작업이 활발하여 여기서 주로 중국제품을 방한 각종의 도기들이 만들어졌는데, 이 가운데 고려에서 온 청자 매병을 본 딴 것으로 보이는 기형도 나타나 주목된다. 

 

 

 

2. 일본자기 발생에 미친 영향

일본에서 자기의 번조에 성공한 것은 사료에 의하면 1616년이라 한다. 오랫동안 회유도의 수준에서 벗어나 일본이 백토를 원료로 한 백자의 번조에 성공하는 데에는 조선 사기장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전하며, 특히 임진왜란-일본은 이를 문록(文祿).경장(慶長)의 역(役)이라 부른다-때 일본에 건너 간 이삼평(李三平)이란 인물이 큐슈(九州) 사가현(佐賀縣)의 아리따정(有田町) 천산(泉山)에서 백토광을 발견하여 처음으로 백자를 만들었다 하여 이 지역에서는 이삼평을 도조(陶祖)라 추앙하고 있다.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자기의 발생에 관해, 조선에서 온 사기장과, 나까사키(長崎)에 거주하던 중국인 기술자와, 일본 상인들이 연계하여 상호협력으로 성공하였다고 보고 있지만, 어쨌든 일본이 전혀 새로운 경지의 자기를 만들 수 있게되는 데에 조선의 영향은 결정적이라 해도 좋을 것 같으며,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 간 조선 사기장들에 의한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즉 16세기 후반에 구주일대의 다이묘(大命)들이 자신의 세력확장을 위해 식산흥업(殖産興業)에 힘을 기울이는 풍조가 일어났는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다이묘들이 도자기의 생산으로 얻게 될 경제적 이윤 때문에 요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귀국 시에 조선의 사기장들을 데리고 와 각지에서 가마를 열었다.

그래서 구주의 가라스소(唐津燒)?싸쓰마소(薩魔燒)?다까도리소(高取燒).아가노소(上野燒), 야마구찌현(山口縣)의 하기소(萩燒) 등이 생겨났으며 이의 영향으로 계속 개요(開窯)가 확산되었다. 이중 대표적인 것은 당진소인데, 여기서 17세기초에 열효율이 좋은 조선식의 연방식등요(連房式登窯)를 도입하게 됨에 따라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으며, 이 새로운 가마구조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일본 자기기술발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조선의 도자기들이 일본에 기술적으로 큰 영향을 준데 비해 기형이나 장식면에서는 크게 눈에 띄지 않으며 주로 다완류에 영향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당진소에 생산한 철화백자류에는 조선 도자기의 영향이 뚜렷이 보인다.

 

 


3. 현대 일본자기에 미친 영향

일본은 일단 자기번조에 성공하자 곧 중국의 상회(上繪) 기술을 받아들여 색회자기(色繪磁器)의 생산에 열을 올리고 기형이나 문양장식도 주로 중국풍을 따랐으며, 또한 일본화도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유럽의 자기시장에 중국 경덕진요의 대타로 등장하는 행운에 힘입어 일본의 도자기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일본적인 양식도 확립되었다. 주로 기교와 기술 위주의 일본도자기들은 19세기말 20세기초반까지 계속되지만, 야나기(柳宗悅) 등에 의해 일어난 소위 ‘민예’ 운동에 동참하는 일군의 도예가들에 의해 일본에서는 현대적인 도자기가 나타나는데, 즉 민예가 전위(前衛)가 된 것이다. 공예 본래의 건강미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한 이 운동의 도예가로는 도미모도 겐기찌(富本憲吉, 1886-1963), 하마다 쇼지(濱田庄司, 1894-1978), 가와이 간지로(河井寬次郞, 1890-1966), 버나드?리치(1887-1979) 등 4인이 대표적이며, 야나기가 관심을 가졌던 조선미술에 영향을 받아 조선도자기에서 그 모델을 구하고자 하여 조선풍, 특히 민간용의 질박한 자기의 조형감을 그들의 작품에 구현하려 애썼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기형이나 장식을 본뜨기도 하고, 여기에 자신들의 창의적인 장식을 가하기도 하였다. 버나드?리치는 일본에서 작업을 오래 하면서 조선도자기를 접하게 되고 이후 유럽에 건너가 한국을 포함한 동양도자기의 조형정신을 전파하여 도예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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