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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자사 개설
  • 작성자한국도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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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자사개설







뤼청롱(呂成龍)

(중국 북경고궁박물원 고기물부 도자과 과장)







자기는 중국 고대의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종류와 우수한 품질로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아왔다. 일찍이 당대의 시인인 陸龜蒙은 일찍이 “九秋風露越窯開,奪得千峰翠色來(비취색 도자기 가마 열렸네. 천 개의 봉우리에서 비취색을 훔쳤네)”라는 말로 당시 월요 비색자의 유색이 비취색 산이 변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형용한 바 있다. 당대의 또 다른 시인인 顧況(약715-814년)은 “越泥는 옥처럼 아름답다”는 말로 越窯 청자가 옥처럼 윤택한 빛깔임을 형용한 바 있다.

중국 자기는 일찍부터 해외로 알려져 세계 각국 인사들의 사랑을 받았고 많은 국가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普魯士황제의 결혼 얘기는 유럽에서 특히 유명하다. 1713년부터 1740 사이에 普魯士황제는 600명의 색슨 근위대와 이웃 왕실에서 중국에서 생산된 자기 화병을 바꾸어 자신의 결혼식에 쓰고자 했다. 이 화병들은 지금까지도 독일의 德累斯 박물관에 진열되어 “근위화병”이라 불리우고 있다. 중국은 예로부터 “도자기의 나라(瓷國)”라고 불려 왔는데, 따라서 영어의 China는 국가 중국을 가리키는 것 외에 도자기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로써 중국의 자기가 세계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을 확인할 수 있다.




2000년 역사의 중국 자기

자기는 옛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도기를 생산하는 기초 위에서 발명한 것으로 중국은 세계에서 최초로 도기를 생산한 국가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얻은 자료에서도 확인되었다. 일찍이 1만년전의 신석기 시대 초기에 중국인들은 이미 의식적으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도기를 제작했다. 비록 기타 다른 국가, 고 이집트, 시리아, 인도 등도 신석기 시대 초기에 도기를 제작했고 후에 그 제작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지만, 그들은 자기를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으며 자기의 발명은 중국만이 향유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는 중국인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기의 성공적인 번조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1. 자토를 사용. 2. 소성 온도가 1200도 이상 3. 고온유 시유.

중국이 언제 자기를 발명했느냐에 대해서는 중국 고고학계에서도 1980년대에 한 차례 토론이 이루어진 바 있고, 의견이 분분하다. 상대(商代), 육조(六朝), 당대(唐代)에 발명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은 현대 과학의 힘을 빌어 고고학자들은 자기(청자)가 발명된 시기를 동한으로 결론지었고 이것은 고고학 발굴 자료와 과학적인 화학 실험 데이터를 근거로 산출된 것이다.

그 근거로는 우선 절강성(浙江省)의 상우(上虞)?영파(寧波)?자계(慈溪)?영가(永嘉)?여요(余姚)에서 동한(東漢)시기의 청자 가마터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로 중국과학원상해규산염연구소는 상우(上虞) 小仙壇 동한 가마토에서 출토된 사격자문(斜格子文) 청자뢰(?) 파편에 대해 분석한 결과 그 소성 온도, 기공률, 흡수율, 항만강도(抗灣强度), 소결(燒結)정도 및 태토와 유약의 결합 정도가 이미 현대 자기의 표준에 부합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그밖에 절강성, 강소성 등 성의 동한기년묘에서 출토된 청자와 가마 출토물은 상호 검증의 역할을 했다. 일찍이 상대 중기에 이미 발명되어 서한 시기까지 생산된 청유 기물은 그 태토의 순도, 소성온도, 태토와 유약의 결합 정도 및 機械 강도 등이 모두 현대 자기의 표준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이는 자기 탄생 이전의 과도기적 산물이라 판단된다. 따라서 이를 “원시자기(原始瓷器)‘라 칭한다. 따라서 동한 시기로부터 자기가 생산되었다고 계산한다면 중국의 자기 생산은 근 2000년의 역사를 가지는 셈이다.







중국자기의 시초

청자는 동한의 남방 지방에서 먼저 나타난 이래 고온에 강하고, 씻기 쉬우며, 우아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삼국, 양진, 남북조 시기까지 많은 발전이 이루어져 자기 생산 지역은 남방에서 북방까지 확대되었고, 태토와 유약의 품질은 한층 더 제고되었으며, 조형과 장식 기법, 소재도 점점 더 풍부해졌고, 번조 기술도 더욱 성숙해졌다. 이 시기의 부장 출토물을 통해서 청자가 이미 점차 청동기, 칠기, 도기 등을 대신해 가장 중요한 부장용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청자가 이미 당시 사람들의 주요한 생활 용품으로 자리잡았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시기의 청자는 조형과 장식면에서 모두 일정한 변천의 규칙을 보여주는데, 조형쪽에서는 키가 작고 통통한 형태에서 가느다랗고 높이가 높아지는 형태로 발전했다는 것이고 장식면에서는 삼국에서 서진 시기까지 성행했던 꽃술, 연주(連珠), 그물 무늬, 마름모 형태 등의 도안으로 구성된 띠 형태의 장식은 동진 咸和년 사이에 (326-224년) 사이에 점차 소실되었다.

서진 영가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점을 찍어 갈색 반점을 만드는 장식 기법은, 동진 시기에 이르러 상당히 유행되었다. 불교가 동한을 거쳐 중국에 유입된 후 남북조 시기에 이르러 흥성하였다. 남조에서는 불상을 만들어 불교에 귀의하는 풍토가 성행해서 만당 때의 시인 杜牧이 <江南春>에서 “남조에 사백팔십개의 사찰이 있는데, 사찰의 기와가 몽롱하게 구름 속에 보이는 듯 하더라.”라고 묘사한 것처럼 한때 흥성하였던 불교 예술은 당시의 청자에도 반영되었다.




남북조 시대의 청자와 백자

남북조의 청자에는 연판문, 인동문을 새겨넣는 것이 유행했고, 특히 최근에도 이미 발견된 바 있는 십여점의 인화와 첩부(貼付), 음각 기법을 한몸에 담고 있는 청자 연화준은 형체가 크고, 기 전면에 걸쳐 장식이 강한데, 覆연판 및 보리수 잎, 인동문 등 청자에서 유행한 불교 예술 소재의 집대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하겠다.

강남지역의 삼국, 양진시기의 부장물 중에서 종종 출토되는 것으로 청자 곡창(穀倉)이 있다. 이러한 용기는 한나라 때의 五聯罐이 변화한 것으로 윗 부분에는 각종 인물과 금수를 빚어 붙였다. 1976년 강소성 오현 사자산 서진묘에서 출토된 청자곡창의 윗 부분에 빚어 붙인 거북이의 등껍질 위에는 “元康出始寧, 用此靈缶,宜子孫, 作吏高, 其樂無極(원강(연호)寧에서 시작되었고, 영을 사용했다. 자손에게 전파하였고, 고관 대작을 지냈고, 그 영화가 끝까지 이르렀다)”라고 써 있다. 육조 시기에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용기를 “靈缶(발음은 靈)”,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북경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청자곡창은 1930년대 후기에 절강성 소흥의 삼국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곡창 위에는 누각, 정자, 인물, 쥐, 새, 사슴, 돼지, 거북, 물고기 등을 빚어 붙였고, 그 배 부분에는 개, 고기, 용 등의 무늬장식 및 “飛”,“鹿”,“句”,“五種”등의 글씨를 넣었다. 거북이 등껍질 패 위에는 “永安 3년, 부유하고 상서롭다. 벼슬아치들은 올바르고, 자손은 흥성하고, 수명은 길다. 천년만년 재앙은 볼 수 없어라.(永安三年時,富且洋(詳), 宜公卿, 多子孫, 壽命長, 千意(億)萬歲未見英(殃)”라고 쓰인 24글자가 씌어 있었다.

“永安”은 삼국시대 東吳의 경제(景帝) 손휴(孫休)의 연호이고, “永安三年”은 서기 260년이다. 이 자기는 온갖 새들이 먹이를 다투고, 풍성한 수확을 축하하고, 가축들이 우리에 가득한 형태를 나타낸 입체 조각 장식으로 1700년 전 강남 오나라의 장원에서 벌어졌던 오곡이 풍성한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생활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다. 이러한 자기를 부장품으로 삼았던 것은 당시 사람들이 미신을 숭배했던 데서 기인한 것으로 신에게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염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은 북조시기에 이미 성공적으로 백자를 번조했는데 이는 자기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 중요한 진보라 할 수 있다. 1958년 하남성(河南省) 안양(安陽)의 북제(北濟) 무평(武平) 6년(575년)의 장군 범수(范粹)의 묘에서 출토된 일련의 백자들은 태토가 정갈하고 유면에 광택이 있어 현재로서는 최초의 백자로 평가되고 있다.




수나라의 청자와 백자

수나라때의 자기는 청자가 주종을 이루며 그 조형이 기본적으로 남북조를 계승하고 있는데, 청자, 반구병, 고족반 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시유 기법면에서 일반적으로 동체 안쪽까지 모두 시유를 하고 동체 바깥쪽은 완전히 시유하지는 않았다. 장식 기법으로는 새기고(刻), 긋고(劃), 찍고(印), 붙이는 방법 등이 있다. 장식 소재로는 연판, 쌍선, 꽃봉오리, 꽃잎, 인동초 등이 자주 보인다. <隋書?何稠傳>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何稠,字桂林……時中國久絶琉璃之作, 匠人無敢?意, 稠以綠瓷爲之, 與眞不異, 尋如員外騎射侍郞。(하주(사람 이름) 자(字)는 桂林이다. 당시 중국에는 오랫동안 유리같은 작품이 없었는데 장인들이 감히 스스로 이것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주가 녹색의 자기로 함으로써 진짜와 다르지 않았다. 이로써 員外騎射侍郞이라는 직함을 얻었다)" 당시 何稠가 청녹색자기로 유리를 모방했고, 상당히 정교한 수준을 보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수나라때 백자의 생산량은 많지 않았지만, 서안(西安)의 수대(隋代) 이정훈(李靜訓)의 묘, 곽가탄(郭家灘)의 수대(隋代) 姬威의 묘, 하남성 안양의 수대장성의 묘에서 출토된 백자개관(白磁蓋罐), 백자용병계두호(白磁龍?鷄頭壺), 백자쌍룡이준(白磁雙龍耳尊) 등으로 볼 때 그 기형이 모두 아름답고, 유약에 광택이 있어 당시의 백자 생산 기술이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다.




중국도자의 번화기, 당과 오

중국 도자 발전의 역사 가운에서 당(唐과) 오대(吳代)는 가장 그 발전이 찬란했던 시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선 자기 생산이 발전했던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많은 문헌자료에 당시 가마의 숫자가 수백을 헤아렸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러한 가마들이 오늘날의 섬서, 산서, 하북, 하남, 산동, 안휘, 강소, 절강, 강서, 호남, 복건, 광동, 사천 성 등의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요장이 많은 만큼 경쟁도 피할 수 없어서 일부 자기 요의 상품은 “丁道剛의 병이 최고”, “鄭家의 小口甁이 천하제일”, “가장 유명한 卞家 小口”과 같이 지금으로 말하면 광고 카피 같은 말을 새겨 넣거나 적어 놓기도 하였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탄생한 월요, 형요, 장사요, 노산요 등 일련의 유명한 자기요들이 배출해낸 자기는 그 독특한 스타일로 당대를 풍미했고, 그 이름을 오랫동안 드날렸다. 다음으로 당, 오대 자기는 그 종류가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공예법이 섬세하고, 조형이 우아한 것으로도 이름 높았다. 조형은 당시의 금기(金器), 은기(銀器)를 많이 모방하여 정치하면서 우아하게 보인다. 당, 오대 자기의 태토는 더욱 더 견고해지고, 세밀해져서 두드리면 금속이나 돌을 두드리는 소리가 날 정도여서 당대 궁정의 악사들은 일찍이 월요의 청자완과 형요의 백자완을 악기로 써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다. 당나라의 段安節이 기원 980년에 지은 <樂府雜錄>에서는 “무종조의 郭道源은 후에 風翔府天興縣丞이 되었고, 태상사조음율관이 되었다. 그는 악기를 잘 두드렸고, 여러 악대를 이끌었고, 그 악기의 숫자가 열두 개에 이르렀다. 절묘한 소리가 멀리 울려퍼졌다. 咸通(860~873년)시기의 오빈동(사람 이름)은 음률을 잘 알아 鼓吹置丞이 되고, 음률관이 되었는데 악기를 잘 다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절강성의 월요청자는 전통적인 청자를 대표하고 하북성의 형요백자는 새로 떠오르는 백자를 대표하므로 오늘날 사람들은 종종 “南靑北白”이라는 말로 당대 자기의 개황을 표현한다. 이는 대략적인 지역 구분으로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종류의 자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오늘날 당대 가마터의 상황을 조사해보면 청자를 생산한 가마가 70% 이상을 차지하여 당시 당대 자기가 여전히 청자를 중심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사람 陸羽는 <茶經>에서 다완으로 당시의 청자요에 대해 등급을 매겼다. 즉, “다완은 월주 것이 가장 낫고, 그 다음이 정주, 자주, 악주, 수주, 홍주이다. ”라고 하며. 월요 청자를 최상에 두었다. 당나라때의 육귀몽(육귀몽), 시견오(施肩吾), 皮日休(피일휴), 孟郊(맹교), 顧況(고황), 鄭谷(정곡), 한악(韓?), 허혼(許渾)등 유명한 시인들도 시를 지어 월요 청자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것으로 보아 월요 청자가 당시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데, 월요청자 중에서도 품질이 가장 뛰어난 것은 “秘色瓷”라 불렀다.

1987년 섬서성 부풍현 법문사 탑기 지하궁전에서 13점의 월요 청자가 출토되었다. 함께 출토된 의물(衣物)을 기재한 석비 상에는 咸通15년(874년)이라고 새겨진 비문이 보인다. 또한 비문에는 당 의종이 석가모니불의 사리 공봉물품을 내리는 가운데, 자기에 대해서는 “비색의 완이 일곱 개가 있으며, 그 중에 두 개는 은으로 테를 둘렀고 비색 반(盤)과 작은 접시가 모두 여섯 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월요 비색자의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대의 백자는 번조 수량으로 보나 품질로 보나 모두 형요를 첫손에 꼽을 수 있는데 당나라 시인 陸羽는 <茶經>에서 “邢窯類銀”, “邢窯類雪”(형요는 은과 같고, 형요는 눈과 같다.)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당나라 때 李肇는 <國史>에서 “內丘 白瓷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귀천에 상관없이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다. 당대 형요는 일찍이 궁중에 자기를 구워 진상한 바 있는데 그 중에서도 “盈"자나 ”翰林“이라는 관이 새겨진 것은 각각 궁정 내의 ”百寶大盈庫"와 “翰林院”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대 자기는 청자, 백자외에도 황유, 흑유, 화유(흑유에 흰 반점이 있는 유), 갈유(褐釉), 素地黑釉花(태토 위에 검은색 문양을 그림), 백유녹채, 珍珠地刻花(바탕을 진주알을 깔아놓은 것처럼 만든 다음 무늬를 새김), 白釉유下남채, 靑釉유下褐綠彩 등이 있다. 당대에는 삼채유도(三彩釉陶)까지도 생산했다. 당대의 무늬 있는 자기를 줄여서 “花瓷”라고도 불렀다. 그 중에서도 화자요고(花瓷腰鼓)(화자로 만든 장고)는 당시 궁중의 악기로도 사용되었다. 당나라 때의 南卓은 선종(宣宗) 대중(大中) 2년(848년)과 4년에 만든 에서 당 현종과 그 재상 송경이 모두 ?鼓연주에 뛰어나 絶技라 불리웠다고 적고 있다.

이 두 사람이 일찍이 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鼓과 腰鼓에 대해 비교한 적이 있다. 즉, “송나라 개부(관직) 경(사람 이름)은 강직하고 소인배처럼 무리지어 다니지 않았고, 북을 잘 다루었다. 황제와 함께 북에 대해 논하며 말하기를 청주석말(靑州石末) 아니면 노산화자(魯山花瓷)인 듯합니다. 악기를 연주하니 소리를 높이 평가하여 이를 한진제이고(漢震第二鼓)라 했다. 악기는 석말과, 화자를 사용했다. 같은 장고지만 손으로 두드려 소리가 좋아서 “翔鼓”가 아님을 알았다. ” 당대 장사요는 유약 아래에 그림을 그린 것으로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 단일한 청색 유약 아래 갈채를 하거나 녹채를 하였으며, 두 가지를 같이 사용하기도 했다. 그려진 인물, 화조, 금수의 모습이 생동감이 넘치고 생생하여 정취가 심원하다.

장사요 자기에는 오언시, 육언시, 칠연시, 연구(聯句), 단구(單句), 속담, 성어, 광고문 등을 넣는 것이 성행했다. 오언시가 가장 자주 보이는데 주로 나그네의 심정이나 변방에서 전쟁에서 나선 심리를 반영한 것이나, 자연 경관을 묘사한 것, 당시의 과거제도를 반영한 작품, 예의를 갖출 것을 일깨워주는 내용들이 있어 당시 사회 생활의 각 방면이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 “天地平如水, 王道自然開. 家中無學子, 官從何處來.(천지가 물처럼 평안하니 왕도가 자연히 열린다. 집안에 학문하는 이가 없으면 관직이 어디서 오리요)라고 말한 작품은 입신양명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당삼채는 당고종시기에 창시되어 성당기에 절정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당삼채의 유행은 당대에 부장품을 호사스럽게 했던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당대의 문헌에 따르면 최고 통치자 및 그 부하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 관직에 따라서 부장용품을 내렸는데 3품 이상이면 90점, 5품 이상이면, 60점, 9품 이상이면 40건을 하사하는 식이었다. 그밖에 당삼채가 당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그 무게감 있는 조형과 아름다운 색채가 절정기 당대의 기백을 나타내어 당시 사람들의 심미관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송, 금 시대의 중국 자기

송, 금 시기는 중국 자기 생산에 있어서 절정기로 사회 각 계층의 자기에 대한 수요가 전에 없이 확대되었다. 송대에서는 대외 무역을 중시했기 때문에 일찍이, 광주, 명주, 항주, 전주 등에 市舶司를 설치하여 중국자기의 해외 시장을 확대하고자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로 발견된 송대 가마터는 전국 19개 성, 시, 자치구의 140여개 현에 분포하고 있다. 치열한 상품 경쟁의 상황에서 정요, 자주요, 용천요, 경덕진요, 건요, 길주요 등의 유명 자기요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들 가마의 자기들은 조형, 유색, 장식면에서 모두 각각의 특색을 보유하고 있어 소비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일부 유명 가마의 공예 기법은 인근, 심지어 비교적 먼 지역의 가마에서도 모방되기도 하여 방대한 가마 체계를 이루기도 했다. 북방에는 정요, 균요, 자주요, 요주요계가 있었고, 남방에는 용천요, 월요, 경덕진요, 건요계가 있었다. 민간 가마의 생산이 크게 발전한 상태에서 조정에서는 먼저 일부 품질이 좋은 가마, 정요, 요주요 등을 지정하여 조정에 도자기를 바치도록 했다. 후에 다시 일부 도자 생산 지역에 “관요(官窯)”를 설치하여 전문적으로 궁정에서 사용할 자기를 생산하도록 했다.

이러한 가마로는 여요, 관요, 균요 등이 있다. 따라서 송대의 자기는 관, 민의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예술적 스타일을 가지게 되었다. 조형면에서 관요 자기는 고대의 동기, 금은기나 옥기를 많이 모방했는데, 형체는 규범에 맞게하고 치수가 엄격하였으며, 고박(古朴크) 전아(典雅)한 모습을 보인다. 민요는 조형이 융통성이 있고 변화가 많으며 실용성에 치중했다. 장식면에서는 관요는 유약의 질에서 앞섰고, 담박함을 숭상하여 은은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반면, 민요 자기는 새기고, 긋고, 찍는 장식의 다양화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소비자들의 다양한 심미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했다.

송대 자기에 대해 말할 때 “五大名窯”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이 말은 원래 宣德 시기에 呂震 등이 집필한 <宣德鼎?譜(선덕정이보)>라는 책에서 “창고에는 柴, 汝, 官, 哥, 均, 定 등 각 가마의 그릇이 있었는데 모양이 아름다운 것에 그림을 그려서 보관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柴窯는 송대에 속하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점차 柴窯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단지 五大名窯에 대해서만 말하게 되었다. 五大名窯로는 송대의 자기 생산의 전모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송대의 도자 제작 수준을 표현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汝窯의 자기는 세상에 전해진 것이 적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백점이 되지 않는다. 그 특징은 회색의 태토와 하늘색의 유약에 바닥의 소성받침이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광택을 띈 옅은 천청색(天靑色)의 유약은 보는이로 하여금 그윽하고 고요한 시각적 효과를 느끼게 하여 송대 사회의 정제된 심미적 취향을 반영한다. 관요 자기는 맑은 진흙(澄泥)을 도범으로 삼고 태토의 색은 철흑색(鐵黑色)이고, 유색은 분청색(粉靑色)에 유약층이 밝고 맑아서 얼음이나 옥처럼 보이며 극히 정치한데, ‘자주철족(입술은 자주색을 띠고 밑둥은 짙은 흑갈색을 보임)’은 한층 고박 전아한 아름다움을 더한다.

哥窯의 자기는 유약면의 빙렬을 충분히 활용해 미적 가치를 높였다. 그물처럼 교차되는 “金絲鐵線”의 빙렬은 고요한 유면에 운율감을 준다. 정요는 오대 명요중에서 유일하게 주로 백자를 생산하던 가마이다. 작품은 종종 새기고, 긋고, 찍거나 금리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장식하였으며 정요의 백자 색이 천하에서 가장 희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균요에서 개발 소성한 장미 같은 자주색과 해당화 같은 붉은 색 등의 동홍유(銅紅釉)는 시처럼, 그림처럼 현란하게 아름답다. 이는 자기의 고온 유약 장식을 위한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폭포가 떨어질 때의 물아지랑이 같고, 석양에 비치는 비취같다”는 말로 균유의 오묘한 아름다움을 형용했다.




중국도자의 새로운 국면, 원?명?청 시기

원, 명, 청 시기에 중국의 도자 생산에는 새로운 국면이 나타나는데 이는 강서성 경덕진의 자기제조업이 빠르게 발전하여 자기 생산 부분을 주도하기위한 실력을 드러내는데서 그 출발을 확인할 수 있다. 원대부터 경덕진에 “浮梁瓷局“을 설치하여 관청에서 사용하는 도자기의 번조를 관장하도록 하기 시작했다. 자기 생산의 중심은 점차 경덕진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명?청대에 조정에서는 다시 경덕진에 어요장(御窯廠)을 설치해 관리를 파견 주재하면서 제작 과정을 감독하도록 했고, 전국의 가장 우수한 도공을 집중시켰고, 우수한 원료를 독점하도록 하여 대량으로 궁정에서 사용할 자기를 생산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각 왕조의 황제의 취향이 달랐고 유행도 변화했기 때문에 도공들은 부단히 생산 기술을 개선하였고 따라서 자기의 색상과 품종이 계속해서 탄생되었다. 관요의 번성은 민영 자기업의 빠른 발전을 촉진시켜 명, 청대에 이르러서는 경덕진을 능가하는 가마가 없을 정도가 되어 경덕진은 전국의 자기 제조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원, 명, 청 시기의 자주요, 용천요, 덕화요는 비록 계속해서 일상용의 자기를 번조해 냈지만 경덕진요에 비하면 생산량, 품질, 품종, 제품의 판매면으로 보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중국의 도자발전의 역사에서 원대는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원 정부가 “匠戶”제도를 실시하여 장인들을 중시하였고, 대외무역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도자수공업의 생산은 한층더 발전하게 되었다. 일찍이 원 왕조가 중국을 통일하기 일년 전에 원의 통치자는 경덕진에 부량자국을 설치하여 경덕진 자기 생산의 발전에 필요 조건을 만족시켜 주었다. 세상에 전해지거나 출토된 “樞府” 또는 “太禧”銘이 있는 卵白釉瓷器가 바로 부량자국 감독하에서 “樞密院”과 “太禧宗? ”을 위해 생산한 전용자기이다. 원대 경덕진요는 제조 기법면에서 많은 진보를 이룩했는데 우선 태토 원료를 제조 사용하는 면에서 과거의 단일 자석(瓷石)을 사용하던 것에서 고령토를 더하는 ”二元배합“방식으로 변화했다.

고령토의 도입으로 자기 태토 중의 산화 알루미늄의 함량이 제고되어 자기의 소성 온도 범위가 확대되면서 형태의 변형이 감소되어 완성품의 비율이 상승했고 동시에 크기가 큰 작품을 소성하는데도 안정적인 조건을 제공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원대 경덕진요에서는 청백자, 흑자를 계속 생산한 것 외에도 청화, 유리홍, 고온코발트유, 高溫卵白釉 및 釉上五彩, 孔雀녹유자 등 새로운 품종을 계속해서 개발 소성해냈다. 이는 경덕진에 명, 청 양대에 전국의 자기 생산의 중심지로 자리잡는데 공고한 기초를 다진 것이라 하겠다.

명대 홍무 2년부터 조정에서는 경덕진에 어요창을 설치해 궁정용 자기를 생산하도록 한 것을 계기로 계속해서 왕실의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어요창은 평상시에는 饒州府(요주부)의 관리에 의해 관리되었는데 대량 소성을 할 때는 조정에서 환관을 경덕진으로 파견하여 감독하도록 했다. 영락제때는 공부사(工部使) 祈鵬을, 선덕시기에는 중관 張善을 가마에 주재하여 제작 과정을 감독하도록 했다.

어요창은 분업 체계가 매우 세분화되어 있어 대완작(大碗作), 접작(?) 반작(盤作) 등의 23개 작업장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도공이 334명이었으며 그들 중 작두(作頭)가 58명이었다. 원료(태토)를 조달하는 것부터 최종 소성에 이르기까지 “그릇 하나를 만드는데 수작업이 일흔 두 번 들어간다.”는 식으로 그 생산이 전문화되어 있어 자기의 품질을 제고시키는데 유리했다. 명대 어요창은 200여년의 시간 동안 대량의 아름다운 자기를 번조했는데 문헌에 언급된 소성 방면의 기록은 당시의 생산량이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알려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明史>, <明實錄>, <大明會典>, <江西省大志?陶書>등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宣德 8년에 御膳機構를 관장하던 尙膳監의 요구에 응하여 한 번에 각양각색의 자기를 44만 삼천 5백점을 소성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成化년에는 정확한 숫자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正德시기에는 조정에서 두 번 환관을 경덕진으로 보내 30여만점의 자기의 제작 과정을 감독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정, 융경, 만력의 3왕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 조정에서는 계속해서 자기 제작의 임무를 부여했는데 대략적인 통계에 따르면 가정 8년에 모두 65만여점을 제작했고, 융경조에는 12만여점, 만력 5년부터 22년까지 모두 51만여점을 제작했다고 한다. 도자기 한 점을 제작하는데 드는 비용에 대해서 <明經世文編> 제 414권에 “어기를 만드는데 시간, 공이 많이 든다. 비용이 많이 든다.” 라고 기재된 것으로 미루어 도자기 한 점 제작하는데 드는 비용이 약 백은(白銀) 한량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유물이나 출토 유물로 보아 명대 영락, 선덕 시기의 청화, 선홍유, 남유, 甛白釉자기, 成化 때의 두채자기, 홍치 시기의 황색 유 자기, 정덕시기의 공작녹유자기, 가정시의 과피녹유자기, 가정, 만력 시기의 오채, 소삼채 자기 등이 명대 어요창의 수준을 집중적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청대 어요창은 비록 순치 시기에 이미 회복되었지만 당시에는 두드러지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가 강희 19년 이후에 어요창의 경영은 정상궤도에 진입해 옹정제, 건륭 양대에 이르러 황제의 관심과 臧應選, 郞廷極, 年希堯, 唐英등 몇 명의 감독관(督陶官)들의 노력에 의해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명대 어요창과 마찬가지로 청대의 어요창도 23개의 작업장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古作(옛 작품을 모방해서 제작하는 것)”, “創新作(새로이 창작하는 것)”과 같은 작업장은 이미 명대에 설치되어 있던 작업장이었는데 이로 미루어 청대 어요창이 생산해낸 작품의 특징은 과거의 기물을 모방하면서 새로움을 더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강, 옹, 건의 삼대에는 명대 자기 중의 화색 품종(花色 品種)을 되살렸을 뿐만 아니라 부단한 개발을 진행시켜 옹정 13년(735년)에 督陶官 唐英이 쓴 <陶成紀事>에 따르면 당시 어요창에서 과거의 작품을 모방하면서 새로이 창조해낸 자기가 57여종에 달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으로 볼 때, 강희제 때의 청화자기는 국산산의 상등(上等) 청화안료로 그림을 그렸는데, 농도가 균일하고 색상이 선명하고 아름다워 특별한 품격을 이루고 있어 청화라는 예술 분야가 이미 새로운 경지에 올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희제 때의 오채가 이룩한 중요한 성과는 유상남채(釉上藍彩: 유약 위에 청화로 그림을 그림)를 발명한 것으로써 이로 이로써 강희제 때 유약 위에 오채가 성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명대의 청화 오채가 오채를 주도하던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옹정, 건륭 시기의 두채는 당시 새로이 출현한 분채가 화면으로 들어가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옹정제 시기의 청유자기는 안정된 색상을 보이는데 번조 기술이 역사상 가장 성숙한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그밖에 ?黃,祭藍, 酒藍, 瓜皮祿, 孔雀綠, ?紅(산화철로 낸 붉은 색, ?紅이라로도 한다), 紫金釉자기 등의 전통적인 소성 기술이 상당히 제고되었다. 명대 중기 이후 잠시 쇠락했던 霽紅釉와 유리홍, 청화유리홍 자기 등이 강희제 때는 이미 회복되어 옹정, 건륭 시기에는 한층 더 발전하게 된다.

청대 강희, 옹정, 건륭 시기는 경덕진 어요창이 새로운 품종을 개발했던 시기로 주로 법랑채, 분채, 유리삼색, 郞窯紅, ?豆紅, 천람유, 창관유, 요변유, 방고옥유, 노균유, 호피삼채, 미황유, 담황유, 법랑홍유, 송석綠釉, ?脂홍유(연지홍유) 등이 있어 도자의 무늬와 색상이 매우 다양해진 시기였다. 건륭 시기에는 특수한 종류의 제작 기법까지 발전하게 되어 각종 轉心甁, 轉頸甁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공예 기법이 정선되고, 예술적 구상이 한층 더 정교해 짐으로 인해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호두, 앵두, 귤, 석류, 땅콩 등의 과일이나 게, 소라 등의 수상 동물을 모방해서 만든 자기 외에도 漆釉, 石釉, 木紋釉, 고동기(古銅器)를 모방한 유약이 있었는데 형태를 실물과 진배없이 재현해냈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보고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건륭 이후 중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상황이 급전직하되었다. 특히 청대 말기는 내외적으로 우환이 끊이지 않아 전체 봉건 사회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기의 생산도 점차 줄어들었고, 색상과 품종도 급속도로 감소하게 시작하여 새로운 창작이라고 할 만한 성과도 없었고, 단지 강희, 옹정, 건륭 시기의 일부 품종을 모방하는 선에서 그쳤다.

청대 어요창의 생산 수량과 소비에 대해서는 비록 통계를 내볼 수는 없지만 관련 문헌에 기재된 내용으로 일부나마 가늠할 수 있다. 督陶官 唐英이 건륭 44년에 쓴 <瓷務事宜示諭稿?序>에서 “나는 옹정 6년에 명을 받들어 일을 나가 도강우(陶江右)를 감독했다. 옹정 13년까지 했고, 든 비용이 수만량이다. 제작해서 원과 탁 등 의 그릇이 삼사십만건보다 적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옹정 13년에 唐英은 <陶成紀事>에서 여기에 대해 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매년 가을, 겨울에는 궁정에 바쳐야할 圓, 琢器皿이 육백여 통(桶)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盤, 碗, 鍾, ?등의 上色圓器(상품의 둥근 그릇류)가 1,6000점이었으며, 선택되지 못한 그릇이 6, 7만점이었다. 甁, ?(뢰), ?, 尊, ? 등의 上色琢器는 이천여점이었고, 선택되지 못한 그릇의 숫자가 2, 3천점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매달 2일과 26일에는 兩期解送准關總管年(卽年堯)處呈樣或十數件,或六七件不等在外。이러한 생산품은 대략 보조 인원 및 관리인원을 포함한 삼백명에 의해 완성되었고, 매년 총 지출은 은자 8,000량 이었다.







중국자기의 해외 수출

일찍이 隋, 唐시기에 중국의 자기는 이미 해외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 후 후대에 이르러서는 중요 상품으로 해외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그 수출 노선으로는 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육로로서 실크로드를 지나 서안으로부터 페르시아로 가는 것이고, 또 다른 길은 해로로서 광주에서 페르시아만을 만을 거쳐 멀리 아프리카까지 이르렀다. 중국에서 아프리카까지는 15,000km 정도나 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유명한 학자인 三上次男은 이 과정을 “어려움으로 가득한 도자 무역의 길”이라 칭하기도 했다. 이 길은 중세에 동서양을 연결한 우의의 길이었으며 동시에 동서문화 교류의 교량이기도 했다. 중국도자와 제조 기술의 해외 전파는 중국의 인류 문명에 대한 중대한 공헌 중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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