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도자사 개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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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자사 개설 아사다 가즈요시(淺田員由) (아이찌현도자자료관 학예부장) 원시시대의 토기 일본의 도자기 역사는 약 12,000년 전의 조몽(繩文)시대부터 시작된다. 조몽시대는 약 일만년 정도 이어졌는데 그 동안 사회?문화 등이 크게 변화했기 때문에 초창기?조기(早期)?전기?중기?후기?만기의 6기로 구분하고 있다. 각각의 시기에는 모두 특징적인 토기가 만들어졌으며 그 시대의 지표가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중기와 만기에는 기술적?조형적으로 상당히 수준 높은 토기가 발달했다. 조몽시대중기(기원전 3,000~2,000년)의 토기는 복잡한 장식을 한 대형 심발(深鉢)이 특징이다. 특히 중부 산악지대부터 관동, 호쿠리쿠(北陸)지방에 많이 보이는 점토띠[紐]를 붙여서 소용돌이무늬(渦卷き文)나 주렴발무늬[簾狀文]을 넣거나 구연(口緣)을 타오르는 화염처럼 표현한 심발은 조몽토기의 정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조몽시대 만기(기원전 1,000~300년)에는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龜ヶ岡]식 토기라고 불리는 정교한 흑색마연(黑色磨硏)토기가 발달했다. 주전자나 향로 등 그 때까지 없었던 특수한 기형에 마소(磨消)기법으로 문양을 넣은 칠흑의 토기는 그 때까지의 조몽토기와는 다른 모양을 보이고 있으며, 조몽 만기 문화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독특한 형체를 한 토우(遮光器土偶)에서 볼 수 있듯이 정신문화의 발달도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를 마지막으로 10,000년에 이르는 조몽토기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기원전 3세기 경, 한반도 남부와 중국 남부지방의 영향을 받아 기타큐슈(北九州)지방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야요이(彌生)문화이며 이에 따른 토기가 야요이토기이다. 벼농사는 단기간에 기타큐슈에서 츄고쿠(中國)?시코쿠(四國), 긴키(近畿), 그리고 이세(伊勢)만 연안지방까지 확산되었으며 여기에서 □□□□(遠賀川)식토기라고 불리는 공통성 있는 토기가 만들어졌다. 그 후 야요이문화는 급속히 전국에 전개되어 지역에 따라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각각의 지역에서 특색 있는 토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야요이시대에는 청동기나 철기도 사용하게 되었는데, 토기가 갖는 역할은 조몽시대에 비해 실용적인 것으로 한정되었다. 조몽토기가 심발(深鉢)형이 중심이었던 데 비해 야요이토기는 저장용 항아리, 취사용(煮炊き用) 옹(甕), 음식기 고배(高杯) 등 각각 용도에 적합한 것이 되었다. 또한 복잡한 장식은 거의 없어졌으며 회전판을 사용하여 가지런한 형태가 만들아지게 되었다. 이는 야요이토기가 조몽토기와는 달리 기능을 중시한 실용적인 도구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세기 말 경 기나이(畿內)를 중심으로 100m를 넘는 대규모 고분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이 이후를 고분시대(古墳시대)라고 한다. 이 무렵의 토기는 질적으로는 야요이시대와 거의 같은 것이 만들어졌으나 야요이토기와 구별하기 위해 하지키(土師器)라고 부른다. 야요이토기는 조몽토기와 마찬가지로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워졌는데 하지키는 점차 가마에서 구워지게 되어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키는 5세기에 도기질(陶器質) 토기가 나타난 후에도 취사용으로 계속 만들어졌다. 대형고분에는 분묘를 장식하기 위해 하니와(埴輪)가 세워졌다. 초기의 하니와는 제사를 위해 항아리나 그릇받침[器臺]를 무덤 위[墳頂]에 나열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대형화되어 사람이나 동물?가옥을 본 뜬 것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특히 피장자(被葬者)의 생활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소박한 가운데에도 풍부한 표정을 보이는 인물과 기물(器物) 등의 상형 하니와는 고분시대 사람들의 조형력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본 최초의 도조(陶彫)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조몽토기나 야요이토기와 같은 토기질의 그릇들은 700~800℃의 낮은 온도에서 구워지기 때문에 물이 새는 것이었다. 이 재질은 불 위에서 취사하기에는 안성맞춤이지만 액체를 저장하는 용기로는 적당치 않다. 오랫동안 물이 새지 않는 도자기가 요구되어 왔는데 드디어 5세기 초 한반도로부터 기술을 도입하여 견고한 도기질 그릇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스에끼(須惠器)라고 부른다. 스에끼는 산의 경사진 면에 가마를 만들고 1,000℃ 이상의 고온에서 굽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도기인데 유약을 칠하지 않는 무유(無釉)의 도기(燒き締め陶)이다. 스에끼는 백제나 가야의 도질(陶質)토기의 기술을 받아 당시의 야마토(大和)정권의 본거지인 현재 오사카 사카이(河內國陶邑)에서 시작되었으며 짧은 기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당초에는 고분에 부장되는 귀중품으로서 장식적인 것도 만들어졌고 백제나 가야의 것을 충실히 모방한 것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실용적인 그릇과 음식기가 많아지면서 일본의 가장 보편적인 도자기가 되어 12세기말기 헤이안(平安)시대까지 이어졌다. 고대의 도자기 일본에서는 처음 유약을 씌운 도기는 7세기말 후지와라쿄(藤原京)시대에 신라 기술로 만들어진 녹유도(綠釉陶)이다. 이는 곧 나라시대 전기에 중국의 당삼채(唐三彩)를 모델로 만들어진 나라삼채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나라삼채는 녹색?갈색?백색으로 나누어 칠한 것으로, 그 이전까지 없었던 선명한 색채의 시유도(施釉陶)로서 나라시대의 화려한 문화를 특징지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채도기는 연유(鉛釉)를 칠하여 저화도(700~800℃)에서 구워내는 연질도기(軟質陶器)이기 때문에 실용적이지는 못하다. 이 때문에 당삼채는무덤의 부장품으로서, 그리고 나라삼채는 불기(佛器)나 장골기(藏骨器) 또는 사원이나 □□□(國□)의 의식 등에 사용된 특수한 도기였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실용적인 고급 자기(磁器)로서 청자와 백자가 애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에 수입되었지만 극히 일부 귀족을 제외하고 사용할 수 없는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헤이안시대 초기에 이것을 대체할만한 사나게(猿投)요(窯)의 회유도가 시작되었다. 회유도(灰釉陶)는 5세기에 시작되는 尾張國의 스에끼가 양질(良質)의 도토(陶土)를 찾아 동부 구릉으로 옮긴 후 8세기중반경에 생산하기 시작한 고화도(高火度) 번조(燔造: 1,200℃)에 의한 일본 최초의 시유도이다. 당초에는 물병(水甁)과 정병(淨甁)?장경병(長頸甁)과 같이 금속제 불구(佛具)를 모방한 것이었으나 9세기초에는 당시 최고의 자기라고 평가받은 중국 월주요(越州窯)의 청자를 모방한, 완(碗)과 접시[皿], 단경호(短頸壺) 등도 생산하게 되었다. 또한 비슷한 무렵 나라삼채의 기술을 이어받은 녹유도(綠釉陶)에도 월주요 청자가 모방되었으나 이른 시기에 생산을 끝냈다. 이들 제품은 일본산 고급도기로서 일본의 전국, 특히 도카이(東海)에서 관동에 걸쳐 대량으로 공급되었다. 이러한 시유도를 생산한 尾張 동부의 요업지를 사나게요(窯)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나게요의 시유도는 尾張국의 특산품으로 유명하며 尾張磁器라 불리고 있다. 사나게요는 6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 걸쳐 나고야(名古屋) 동부의 구릉지에 수천개의 가마를 만들게 된 고대 최고의, 그것도 최첨단의 요업지이다. 여기에서 구워진 회유도는 수입하는 중국도자기를 대신하는 고급품으로서 널리 일본 전국에 공급되어 각지의 요업생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헤이안시대 중반 경부터 일본과 송(宋) 무역이 활발해지고 중국자기의 수입이 증가되자 중국자기의 대용품인 회유도는 고급품으로서의 가치가 점차 낮아져갔다. 이 무렵부터 사나게요에서는 고급품의 생산을 중단하고 완(碗), 접시[皿]를 중심으로 한 중급품을 대량생산하여 보다 넓은 계층에 공급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사나게요의 제품은 보다 널리 침투되었고 생산은 한층 더 확대되어간 것이다. 그러나 헤이안시대 말기에는 일본과 송(宋) 무역은 더욱 더 활발해져 조질(粗質)의 백자가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사나게요의 회유도는 상자완(山茶碗)이라고 불리는 한층 더 값싼 무유(無釉)의 도기로 바뀌어 간 것이다. 상자완를 생산하는 가마는 조질의 완과 작은 접시만을 대량생산하는 등 일상용 식기로서 주변지역의 수요에 대응하였다. 그래도 증대되는 수요에 대해서는 종래의 사나게요의 지역만으로는 생산이 따라가지 못하여, 이 때까지 가마가 없었던 아쯔미(渥美)? 도코나메(常滑)?세토(瀨戶) 등 사나게요의 주변지역에까지 생산지를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요업이 시작되고, 이어서 전국에 파급되어 중세의 요업을 성립시켰다. 중세의 도기 고대 중심적 도기인 스에끼는 원래 지방호족의 자체 생산으로서 비교적 좁은 지역에 공급되기 때문에 생산지가 매우 많았다. 아마 율령(律令)시대의 지방에는 적어도 몇 군데의 스에끼 가마가 존재했으며 일본 전국에는 천여개소 이상의 스에끼 생산지가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산업이 발달하는 가마쿠라(鎌倉)시대에는 이러한 소규모 스에끼 가마가 도태되고 20~30군데의 대규모 요업지로 집약되어갔다. 이들 가마에서는 항아리, 옹(甕), 절구[?鉢]를 주요제품으로 생산하여 넓은 지역의 수요를 충당한 것이다. 이 때문에 요업지의 대부분은 제품의 수송에 편리한 해안 가까이에 입지하고 있으며 해상교통을 이용하여 광범위한 지역에 제품을 공급했다. 이러한 요업 생산과 공급 방식을 중세식 가마라고 한다. 특히 이 무렵부터 수요가 증대되는 대형 옹(甕)의 생산과 공급은 종래의 소규모 스에끼 가마로서는 대응할 수가 없어서 고분시대 이래의 스에끼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중세요는 산업 발전에 따른 상품 유통의 발달에 의해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특히 무겁고 깨지기 쉬운 도자기의 운반은 해상교통의 발달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러한 중세 요업지도 지역간의 경쟁으로 더욱 도태되어 이윽고 세토?도코나메(常滑)?이치젠(越前)?비젠(備前) 등의 大산지가 형성되어간 것이다. 이 외에 단바(丹波)?시가라키(信樂)가 현재까지 생산을 계속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육고요(六古窯)라고 불리고 있다. 1)세토 요(窯) 세토는 사나게요의 기술을 이어받아 중세 유일의 시유도를 생산한 요업지이다. 헤이안시대 말기에 사나게요가 무우(無釉)의 상자완(山茶碗)을 제작하는 요(窯로) 이행하면서 당시 국내에 유입된 중국 송(宋백)백자를 모방한 네귀항아리와 병을 생산해 전국에 공급했다. 가마쿠라(鎌倉)시대 후기에는 갈색 유약을 씌운 도기가 등장하며 이 무렵부터 인화문(印花文)과 꽃무늬[畵花文]로 장식하는 방법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세토의 제품은 중국도자기를 모방한 일본산의 고급도기로서 가마쿠라 무사들에게 애호되었으며 거의 일본 전국에서 출토되고 있다. 또한 세토의 회유도에는 명백히 고려청자를 모방한 것으로 생각되는 병도 발견되어 조선과의 깊은 관련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시기부터 차(茶)를 마시는 풍습이 퍼져 덴모쿠(天目)다완과 화병, 茶入 등의 다도구(茶道具)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세토에서는 자기를 굽지 못했으나 철유(鐵釉) 도기에 관해서는 중국 것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16세기 중반에는 도공들의 대다수가 미노(美濃)지방으로 옮겨가 세토의 요업생산은 일시적으로 쇠퇴된다. 2)아쯔미 요(窯)와 도코나메 요(窯) 아쯔미요와 도코나메요는 11세기말부터 12세기초에 사나게(猿投)요의 기술이 계승되어 시작된 요업지이다. 아쯔미요가 있는 아쯔미반도는 이세(伊勢) 신궁(神宮)과 인연이 깊은 지역으로서 12세기초에는 경통(經筒) 외용기(外容器)와 장골기(藏骨器) 등 종교성 짙은 특수한 제품이 만들어졌다. 또한 이 시대의 도기로는 드물게 회화문양이 있는 것도 만들어졌다. 이들 제품은 태평양 연안의 이와테(岩手)현에서 에히메(愛媛)현까지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아쯔미의 흙은 도기생산에 적합하지 않아 도코나메요와의 경쟁에 뒤져서 14세기에는 생산을 중단한다. 도코나메는 尾張의 중심에 가깝고 양질의 도토가 풍부하며 또한 일찍부터 해상교통이 발달해 있는 등의 유리한 조건으로 일본 전역에 공급될 수 있었다. 현재 도코나메를 중심으로 하는 지타(知多)반도 전역에 약 3,000기의 가마터가 알려져 있으며 이는 중세 최대의 요업지라 할 수 있다. 많은 제품 중에서도 적갈색의 대형 옹(甕)과 항아리[三筋壺]는 도코나메를 대표하는 것이다. 3)이치젠 요(窯)와 스즈 요(窯) 이치젠(越前)요는 사나게요의 기술계보를 잇는 중세요로서 적갈색으로 구운 옹(甕)이나 항아리를 동해연안에 널리 공급했다. 스즈요는 스에끼를 중세요로 발전시킨 산지로서 제품은 스에끼와 같은 흑회색이었다. 이 둘은 모두 호쿠리쿠(北陸)에서 산인(山陰)지방의 수요에 대응하는 요업지였으나 이윽고 낡은 기술에 의한 스즈요는 쇠퇴되어 역사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이치젠요는 호쿠리쿠지방 최대의 요업지로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발전한다. 4)시가라키 요(窯)와 단바 요(窯) 시가라키(信樂) 요와 단바(丹波) 요는 둘 다 산간부에 입지하는 요업지인데, 당연히 제품의 수송에 관해서는 조건이 나쁘며 전국 규모의 산지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토라는 대 소비지에 가까워서 그 후에도 오랫동안 생산을 계속한 곳이다. 이 두 곳은 모모야마(桃山)시대 이후부터 차 마시는 풍습의 융성으로 더욱 발전된다. 특히 시가라키요의 장석(長石) 입자가 섞인 도토는 차(茶)의 세계에서 귀중히 여겨졌다. 5)비젠 요(窯) 비젠은 나라?헤이안시대에는 스에끼의 주요 생산지였으나 중세에는 세토 연안지역에 제품을 수송하기 위해 해안부에 가마를 만들게 되었다. 특히 하리마(播磨) 지방의 스에끼계통의 생산지가 폐쇠되자 거의 시코쿠(四國), 산요(山陽), 긴키 지방 전역에 큰 항아리?절구(?鉢)를 공급하게 되었고 도코나메요(窯)와 대항하는 서일본 최대의 요업지로 발전했다. 비젠요의 큰 항아리[大甕]에는 (三石入り)와 (五石入り)와 같은 대형의 것이 많으며 염색(染物)과 양조(釀造) 등의 산업 관련 제품으로서도 이용되었다. 모모야마(桃山)시대의 도기 전국(戰國)시대 말기 그 때까지의 중국 제품을 애완하던 다도(茶道)가 변화하고 일본산도기나 조선의 자기도 사용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고 불리는 조선의 일상식기(日常食器)인 완(碗)은 새로운 다도(茶道; 茶の湯)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 다도는 무라타슈코우(村田珠光)와 다케노죠오(武野紹鷗)에 의해 발전되어 센리큐(千利休)에 의해 초암차(草庵茶)로 집대성된다. 모모야마 시대는 이 초암차가 중심이 되고 시노(志野), 오리베(織部)와 같은 새로운 도기가 창작되는 때이다. 특히 기존의 중국도자기를 최상으로 생각하는 미의식(美意識)이 다소 약해지고, 조선도자기를 중심으로 하면서 다른 여러 나라의 도자기도 차도구로서 취급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가라쯔(唐津), 미노(美濃), 비젠(備前), 시가라키(信樂) 등의 요업지가 초암차에 적합한 오리지널 다도(茶陶)를 탄생시킨 것이다. 1)미노의 시유도(施釉陶) 16세기에 들어서면 세토의 요업은 쇠퇴하고 많은 도공들이 미노(美濃)지방―다지미(多治見)시?가니(可兒)시?도키(土岐)시 등―으로 옮겨갔다. 여기에서 구워진 도기가 모모야마 시대를 특징지우는 황색 세토(賴戶)?시노(志野)?오리베(織部)와 같은 시유도이다. 이 시유도들은 초암차 격식에 도입되어 신흥 영주들과 사카이(堺)?하카타(博多) 등의 대상인들에게도 애용되었다. 시노는 조선백자에서 볼 수 있는 장석유(長石釉)를 기본으로 하는 일본 최초의 백색 유약의 시유도이다. 따라서 붓으로 문양을 그릴 수 있게 되었으며 문양의 표현도 매우 풍부해졌다. 그러나 시노의 특징은 문양이 매우 간소하게 그려지고 바탕[地肌]의 홍색과 유약의 백색과의 조화에 의해 묘미를 자아내는 데에 있다. 오리베는 17세기에 등요(登窯)가 도입된 후에 시작되는 극히 조형적인 도기의 총칭이다. 기본적으로는 오리베유(釉)라고 불리는 동록유(銅綠釉)의 유약을 칠하는 것인데 흑색이나 홍색?백색 등의 다채로운 유약을 사용한 컬러풀한 것도 적지 않다. 게다가 의식적으로 불균형한 다완 등 현대도예로 통하는 작품도 만들어졌다. 또한 이 시기는 유럽인이 많이 건너 오고 일본인도 동남아시아로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등 상당히 국제적인 시대로서 이를 반영하여 유럽문화를 도입한 다양한 조형의 도자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시노도 오리베도 에도시대에 접어들어 섬세하고 우미(優美)한 교야끼(京燒)가 애호되게 되면서 점차 생산을 중단한다. 2)가라쯔의 도자기 가라쯔(唐津)는 16세기에 조선 자기의 수입이 증대하면서 가라쯔지방에서 그 대용품으로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생산은 소안차(草庵茶)의 융성과 함께 발전되어 서일본일대에 공급하는 생산지가 되어 갔다. 특히 조선식의 등요(登窯)의 도입은 미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가라쯔의 태토는 백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일부 다도구를 제외하고 일상적인 생활용품의 생산에 그쳤다. 3)시가라키, 이세(伊賀)의 야키모노 소안차(草庵茶)에서는 그 때까지 수입해 쓰던 중국도자기를 대신하여 일본산도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원래 일상 잡기(雜器)의 산지인 비젠?단바?시가라키 등지에서는 처음에는 항아리나 발(鉢)로서 물항[水指]과 꽃병[花入] 대신 사용했었으나 점차 소안차에 적합한 차 도구를 만들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비젠?이가의 물항, 시가라키의 화병 등은 소안차의 정신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서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롭고 힘찬 모모야마의 도자기도 17세기 중반 일본이 쇄국정책을 취함으로써 종말을 고한다. 에도시대의 도자기 에도시대에는 아리타야키(有田燒)와 교야키(京燒)가 시작된다. 아리타야키는 조선의 기술자에 의해 시작된 일본 최초의 자기이며, 생산량의 대부분은 아시아?유럽에 수출되었다. 교야키는 닌세이(仁淸), 겐잔(乾山)으로 대표되는 다채색의 화려한 도자기로서 실용 뿐만 아니라 감상용으로도 애호되었으며 오늘날 현대 도예의 선구가 되는 것이었다. 1)아리타의 도자기 17세기 초, 조선의 도공(陶工; 沙器匠)에 의해 아리타(有田)에서 일본 최초의 청화백자(靑畵白磁; 染付磁器)가 만들어졌다. 그 후 노력이 거듭되어 17세기 중반에는 색회(色繪)자기가 개발되었고, 그 후 이 자기들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아리타 자기는 이마리(伊萬里)의 항구에서 실어 보냈기 때문에 이마리야키(伊萬里燒)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아리타의 제품 중에 가키우에몽(?右衛門)양식, 나베시마(鍋島)양식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가키우에몽양식의 작품은 유백색(乳白色)의 바탕에 여백을 많이 살린 담채(淡彩)의 회화적인 문양을 그린 것으로서 독일 마이센 등 유럽 자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베시마양식의 작품은 사가(佐賀) 나베시마번(藩)의 어용(御用) 가마에서 구워진 단정하고 아름다운 정치(精緻)한 색회자기이다. 이는 주로 장군 가문에 대한 헌상품이나 영주간의 증답품으로 사용되는 것인데 당시의 상류계급의 취향을 반영한 도자기이다. 18세기 중반경부터는 국내에 제품을 공급하기 시작하는데, 그 때까지 국내 수요를 충족시켜 왔던 세토요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2)교야키(京燒) 16세기중반(寬永)부터 자유롭고 호쾌한 모모야마문화를 대신하여 우아하고 정치(精緻)한 문화가 교토의 문화 살롱이라 할 수 있는 공가(公家)?사원?죠오닌(町衆)의 모임에서 시작된다. 그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노노무라 닌세이(野?村仁淸)에 의해 색회(色繪)도기가 탄생했다. 단정한 조형과 우아하고 화려한 색회의 문양은 그 때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감상적 도기의 탄생이었다. 그 이후 교토는 □□□□(尾形乾山), □□□□(奧田□川), □□□□(靑木木米) 등의 도공이 배출되어 교토의 전통을 키워 나간 것이다. 에도 중기 이후는 교오토(京都)의 토산으로 인기가 있어 전국에 확산되었다. 3)세토의 도자기 16세기에 쇠퇴했었던 세토의 요업도 에도시대 □□□□(尾張德川)가문에 의해 재흥되어 국내용 도기생산이 회복되었다. 아리타의 자기가 수출을 주로 했기 때문에 세토의 도기는 국내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대량생산되었다. 세토가 도자기의 대명사가 되는 것은 이 무렵부터이다. 그러나 18세기중반부터 아리타의 자기제품이 국내에도 공급되자 도기질인 세토의 제품은 불리하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세기초에 세토에서도 자기생산을 시작한다. 그러나 세토는 양질의 자기원료가 없었으며 또한 선발인 아리타와의 경합을 피해 색회자기는 생산하지 않고 청화자기의 생산에 전념했다. 4)그 외에 도자기 에도시대 중기이후는 각 번(藩)이 식산흥업을 위해 도자기 생산을 시작하여 막부 말기까지 대부분의 번에서 도자기생산이 이루어졌다. 세토의 기술을 도입한 번은 세토 풍의 야키모노를, 아리타의 기술을 도입한 번은 청화자기를, 교토의 기술을 도입한 번은 색회자기를 각각 생산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마는 단기간에 끝나고 말았다. 이러한 가마 중 몇 군데는 민예품이나 토산품 생산으로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近代의 도자기 메이지(明治)정부는 재정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요업의 근대화를 꾀하고 도자기 수출을 보호 권장했다. 특히 이 무렵부터 활발해진 만국박람회에 산업진흥의 입장에서 적극 관여했다. 이에 따라 세토?아리타?교토?구타니(九谷)?사쯔마(薩摩) 등의 요업지는 매우 정치하고 화려한 도자기를 만들어내고 각국의 만국박람회에 출품해 호평받았다. 이들 도자기는 유럽 국가들에 큰 영향을 주어 japonisme 이라고 불리는 문화현상을 일으켰으나, 유럽에서 아르누보(art nouveau)의 시대가 되어 고전적인 스타일과 불필요하고 기교적인 일본 도자기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반성은 새로운 도자기를 탄생하게 한 것이다. 그 때까지의 장인적 작업에서 벗어나 보다 창작적인 도자기, 즉 미술로서의 도자기를 지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쇼와(昭和) 초기에 새로운 楠部彌□와 淸水六兵衛 등이 당시 가장 권위 있다고 여겨졌던 일본미술전람회(日展) 도예부분에 참가함으로 꽃피었다. 같은 무렵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도미모토 겐기치(富本憲吉)?가와이 간지로(河井寬次郞), 浜田庄司 등에 의해 민예(民藝)가 제창되었다. 민예운동의 원점에는 야나기에 의한 조선의 미술공예에 대한 깊은 애착이 있었으며, 드디어 삼백년전 모모야마시대 이도(井戶)다완의 경우와 같이 조선도자기 붐이 다시 일어났다. 또 이러한 복고적 움직임에 따라 일본의 전통적인 도자기, 특히 모모야마시대의 도기를 재평가하고 이를 복원하려는 일군의 도예가들(加藤唐九郞, 荒川豊藏, 金重陶陽, 中里太郞衛門)이 등장했다. 이처럼 쇼와 초기에는 현대 일본도예의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현대도예는 재개된 일본미술전람회를 축으로 미술로서 도자기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는데, 1950년대에는 용기(容器)의 기능을 완전히 배제한 순수한 조형으로서 만들어진 오브제라고 불리는 작품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현재에는 많은 미술계의 대학에 도예과가 설치되어 전통적인 도예도 포함하여 새로운 도예로의 방향이 모색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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