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 와라시나(Patty Warashin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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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페미니스트 - 패티 와라시나(Patty Warashina) [패티 와라시나, 1940~] 1. 성장과정 도예가 패티 와라시나는 와싱턴주 스포캐인에서 1940년 일본 이민자인 마사이 패트리샤 와라시나의 3형제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민 2세대로서 일본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전형적인 미국인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일본인의 성향을 고루 갖추고 있어 그녀의 성장과정은 양문화의 혜택과 괴리를 동시에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교적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난 패티 와라시나는 와싱턴주 시애틀에서 고등학교를 마치h 와싱턴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을 입학하여 그곳에서 대학을 마치고 1964년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러나 처음 그녀의 시작이 도예는 아니었다. 대학시절 그녀는 조각을 전공했고 그곳에서 후에 든든한 조력자이자 동료들인 로버트스페리(Robert Sperry), 해롤드 마이어(Harold Myers), 루디 오티오(Rudy Autio)등과 교류했다. 1960년대 패티 와라시나는 주로 갈색위주의 주전자들을 만들었다. 그녀의 작품들이 대부분 갈색 일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가마 등 소성기기가 발달하지 못했고 도예인구가 많지 않았기에 사업가들에게 금전적 혜택이적은 유약의 개발은 관심이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작품은 극히 과장적인 표현, 환각적이며 불경스럽기까지한 직접적인 표현으로 당시 주변 작가들의 작품과 뚜렷이 구별되었다. 그녀의 첫 번째 개인전은1962년에 피닉스 아트 갤러리(Phoenix Art Gallery)에서 열렸으며 2년 뒤 대학원 동기였던 프레드 바우어와 1964년 결혼하여 1970년 이혼하기까지 패티 바우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2. 작품성향 초기 그녀의 작품에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캘리포니아 펑크, 초현실주의였다. 특히 50년대와 60년대에 걸친 매우 실험적이고 다소 과격한 예술적 성향의 서부해안의 도자조각들은 그녀의 작업이 변화하도록 자극하였다. 서부해안의 다소 실험적인 이러한 작업성향은 프레드 바우어와 함께 저온유약의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만들었다. 나아가 유약조차 바르지 않고 아크릴칼라물감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려 당시 도예가들 사이에 아크릴 채색작품이 도자기인가라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시기의 화려한 러스터 유약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 그녀의 작은 입상 시리즈에서 빛을 발하였다. 그녀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은 풍자, 유머 그리고 그녀 특유의 상상력이다. 이러한 그녀의 성향은 주변 동료였던 로버트 스페리(Robert Sperry), 하워드 코틀러(Howard Kottler), 그리고 남편인 프레드 바우어(Fred Bauer)에게 연유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유쾌한 무리에서 그녀만의 독특한 위트는 그녀를 화제의 중심에 항상 데려다 주었다. 그녀는 1970년대 후반 시애틀 대학에 출강하면서 그녀 특유의 풍자와 유머를 학생들에게까지 전파시켰다. 당시 비평가들은 바우어의 작업이 다소 무거운 느낌을 준다면 와라시나는 명랑함과 신랄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갈색주전자와 육중한 의자들을 만들던 와라시나는 1960년 후반 자동차모양의 가마 시리즈들을 만들었다. 가마에서 불이 나거나 가마인지 자동차인지 모를 다분히 초현실주의의 영향아래 있는 이 작품들은 도예가로서 이제 막 정체성을 깨닫기 시작한 그녀를 잘 말해준다. 나아가 1970년대의 작업은 와라시나의 숨겨진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극히 개인적인 아픔-프레드 바우어와의 이혼-과 결혼생활의 고초들을 자서전적인 시각에서 풀어낸 그녀의 작품들은 종교적인 색채를 짙게 내뿜고 있다. 대부분 피라미드나 제단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70년대 작품들은 극히 제단을 무대삼아 극히 과장적이고 희극적인 고대 그리스 연극 보는 듯 하다. 1980년 후반에 들어 와라시나는 작은 입상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치 요정처럼 보이는 그녀의 작은 입상들은 마치 중세 서양화가 히메로니 보슈(Bosch,Hieronymus)의 그림에서 바로 뛰쳐나온 듯 다양한 표정과 동작을 지닌 채 오브제와 함께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또한 다양한 실재 오브제들-유리구슬, 밧줄, 붓 등을 끌여 들여 그녀가 만든 작품조차 실재처럼 보이게 한다. 여기에서 조차 그녀의 연극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시애틀시위원회의 위탁을 받아 서부해안 작가들을 미니어처로 마치 행진하듯이 배치한 대작들은 이러한 연극적 요소를 극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연이은 대작들은 그녀를 작가로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작은 난쟁이들의 나라에서 거인의 나라로 이주해왔다. 거의 2m가 넘는 이 거대한 입상들은 유난히 화려한 색채들로 치장하고 때로는 새들, 때로는 침몰한 배와 함께 한쪽 발을 담근 채 어디론가 바삐 그들의목표를 향해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 절친한 동료였던 하워드 코틀러(Haward Kottler)의 죽음이후 그녀는 죽음에 대한 경험 때문인지 매우 특이한 형태의 작업들을 선보였다. 한쪽에는 미소 짓는 천사의 모습을 뒷면에는 험상궂은 악마의 모습을 가진 마치 ‘지킬 앤 하이드’를 보는 듯한 이러한 두상 시리즈는 한동안 대량으로 제작되다가 2000년대에 들어 그녀의 작업은 70m~90m내외로 그 크기가 작아지고 지난 80년대의 작은 인형들이 그리하였듯 손에 여성성을 상징하는 다양한 오브제들-꽃, 바늘, 실, 천조각 등을 들고 관객을 향해 야릇한 미소와 조소를 동시에 보낸다. 화려한 색은 모두 사라지고 중채도의 흙 고유의 색만이 남아 여성이 날마다 직면하는 빛바랜 꿈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와라시나는 세계 현대 도예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즘 도예가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녀의 작품을 페니미즘적인 시각으로만 그 범위를 정하여 보는 것은 그리 올바르지 않다. 그러기에 그녀의 뛰어난 성형능력과 끊임없이 변하고자 새로움을 쫒는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은 그 어떤 도예가들도 쉽게 흉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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