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剛 유근형 - 500년간 단절되었던 고려청자기술 복원한 선구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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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간 단절되었던 고려청자기술 복원한 선구자 해강(海剛) 유근형 [柳根瀅, 1894 ~ 1993] 해강 유근형은 고려시대 이후 500여 년 간 단절되어 잊혀졌던 청자 제작기술을 복원하여 고려청자를 재현하였으며, 1993년 100세로 작고할 때까지 고려청자 전통을 계승하는데 노력을 기울인 작가이다. 오늘날 고려청자 전통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해강 같은 인물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또 한국 근 현대 도자의 개척에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으며, 60년대 초 경기도 이천에 정착함으로써 고명순 김완배 지순탁 등과 함께 이천 도예촌이 형성되는데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이다. 해강은 1894년(고종 31년) 서울 후암동에서 태어나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청자 재현에 뜻을 품고 평생을 청자연구에 바쳤다. 그는 1911년 일본인 소유의 한양고려소(漢陽高麗燒)에서 상감조각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도예에 입문한 후 고려청자 재현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유약 제조법을 연구하기 위해 강원도 양구 방산(放山)에서 분원 사기장 출신인 김완배와 교우하고, 청자 제작에 접합한 태토를 찾기 위해 황해도 봉산 관정리와 함경북도 생기령 등을 돌며 탐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약의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전국에 산재해 있는 청자 고요지(古窯地)를 답사하기도 했다. 유약과 태토를 찾기 위한 전국적인 답사하면서 그는 수원의 칠기장(漆器場: 오목내)과 여주 오금리 자기장(磁器場)에서 실험을 계속했고, 이무렵 김춘배, 완배 형제의 도움으로 청자를 완성하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한국의 공예와 도자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던 아사카와 학교(淺川伯敎)와 교유하였으며, 그의 소개로 1921년 일본에 건너가 경도 고려소(京都高麗燒)에서 청자 저작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1926년 그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첫 번째 청자 요장으로 영등포에 고려청자 요장을 만들었다. 1928년 일본 별부시(別府市) 박람회에 청자를 출품하여 금상을 수상한 그는 황인춘 최인환 최남성과 함께 청자제작을 계속했고, 고려 청자의 오묘한 비색을 재현하기 위해 실험을 계속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국가 총동원령이 공포된 1930년대 말부터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20여년 간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했던 해강은 1950년 과거 일본인이 설치해 놓았던 마포형무소 요장에 잠시 머물렀으며, 이후 여주의 한양요업사나 인천의 중앙도자기 공장 등에서 활동했고, 그때 제작한 청자를 해방 10주년 기념박람회 등 공예품 전시회에 출품했다. 1956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국제박람회에 청자를 출품하여 금상을 수상하였으며, 그 해에 국립박물관 부설 한국조형문화연구소(성북동가마)에 머무르면서 청자를 제작하였다. 성북동가마는 조선백자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도자를 목적으로 설립되어 운영되었으나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곧 문을 닫고 말았다. 그후 그는 조각가 윤효중이 설립한 한국미술연구소(대방동가마)에서 청자제작에 열중했다. 그러나 대방동가마 역시 설립자의 사정으로 곧 문을 닫았다. 1959년 여름 이천에 있던 칠기가마를 찾았던 해강은 이듬해 장남 유광열(현 해강도자미술관 관장)과 함께 이천에 해강 고려청자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63년 그는 고려청자 재현의 공로를 인정받아 인간문화재에 수록되었다. 해강은 1980년대에 12회의 일본 전시회를 개최하여 일본인들에게 명성이 높았으며, 일본인들에 대한 한국 전통도자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에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90년에 장남 유광열과 함께 해강도자미술관을 설립하였으며, 1993년 10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해강은 85년 동안 오직 고려청자 연구와 제작에 몰두하여, 500년간 단절되었던 고려청자 기술을 복원하고, 아름다운 고려청자 전통을 현대에 연결시켜준 도예가로 높이 평가된다. 현재 이천에서 활동하는 많은 도예인들이 그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천도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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