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도자전문자료

로버트 아네슨(Robert Anesson)
  • 작성자한국도자재단
  • 등록일
  • 조회수7582




 

로버트 아네슨(Robert Anesson)

 

 


 

[로버트 아네슨, 1930~1992]

 

 

로버트 아네슨(Robert Arneson, 1930~1992)의 예술활동은 예술 사회로부터의 영향만큼이나 지역문화특성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미국의 북서부 베이에어리아(Bay Area)에서 성장하고 줄 곳 그곳을 무대로 활동한 아네슨은 후에 새로운 서부의 예술사회에 활력을 불러 넣어준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의 한명이다.

 

노르웨이와 포르투갈 가문의 혼혈로 태어난 아네슨은 어린 시절 대부분 시간을 만화책에 열중하면서 보냈다. 그는 점차 만화책의 이미지나 주인공의 모습을 모사하기 시작하였으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만화적 취향의 그림들을 계속 그려나갔다. 만화가로서의 인생을 그리며 고등학교 졸업 후 한 지방지 스포츠 만화가로 일하기도 하였는데 신문사 재직기간 동안  ‘The college of Marine'에서 도예수업을 청강하며 도예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도예보다 만화 감각에 익숙해져 있던 그에게서 도예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 담당 교수는 만화나 상업미술을 전공할 것을 권유하였다.

 

아네슨은 후에 그 교수의 추천으로 캘리포니아 공예 미술학교(California College of Art and Craft)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도 선천적으로 저항적인 성격의 아네슨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 그 이듬해에 아네슨은 이 학교에 다시 돌아와 상업미술에서 미술교육으로 전공을 바꿈으로써 학교생활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는 미술 교육의 전공 이수과정에서 공예전반에 관한 수업을 섭렵하고 다시 도예수업을 들었다. 캘리포니아 미술공예학교를 졸업한 후에 아네슨은 다른 공예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이 시기의 생활은 비록 만화 제작이긴 하였지만 창작생활에서 한 걸음 물러난 그를 불안하게 하였으며 이것은 그가 도예에 대한 열정을 갖도록 만들어 주었다.

 

1957년 세라믹 먼슬리(Ceramic Monthly)라는 잡지를 통해서 피터 불코스의 작품을 처음 접한 아네슨은 다른 젊은 도예가들이 그러하였듯이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그는 불코스에게 사사받기 위하여 로스앤젤레스로 이주계획까지 세웠으나 아내가 임신하게 되어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로스앤젤레스로 이주를 포기한 아네슨은 오클랜드(Oakland)에 있는 밀스 컬리지(Mils College)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전통적인 도예지식에 해박한 안토니오 프리에토(Antonio Prieto)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대학원 시절 아네슨은 안토니오 프리에토의 도예계에서 명성에도 불구하고 불코스와  추상표현주의 도예의 과감성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1958년 석사 졸업 후 그는 밀스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고 피터 불코스에 대한 강한 반발을 가지고 있던 안토니오 프리에토와 충돌을 일으켜 끝내 그와의 결별로 이어졌다.


밀스대학을 떠나 데이비스(Davis)에 위치한 주립대학교에 이주한 아네슨은 새로운 환경과 인물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곳은 예술의 황무지에 가까웠으며 몇몇 진취적인 미술대학의 교수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곳에서 아네슨은 동료교수들과 함께 California Sculpture'에 뒤틀린 변기에 오물을 그대로 보여준 「Funk John」을 출품하였는데 그 다음날 너무도 과격한 표현 때문에 철거요청을 받았고 그 해프닝 때문에 그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 이후는 그는 변기시리즈를 제작하며 펑크계열의 작품을 제작하는 펑크 예술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아네슨은 펑크아트에 그의 열정을 쏟아 부었으며 교수로 재직하게 된 데이비스 주립대학교의 TB-9(Temporary Building-9)이라는 철제건물에서 작업하던 아네슨과 제자들은 스승과 제자라는 규범과 위계질서를 무시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펑크아트의 표현적이고 공격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펑크아트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던 아네슨은 60년대 후반 펑크아트가 그 생명력을 다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아네슨은 70년대 초반부터 자화상을 만들면서 초상에 대한 연구와 기술적 발전을 이루어내어 다시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초기 작품들은 직접 점토로 쌓아올려 제작하였으나 후에 캐스팅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하나의 기본틀로 여러 개의 다양한 표정을 제작할 수 있었다. 70년대 중반 해학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을 무렵, 그는 몸속에서 암이 자라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원기왕성하고 난폭한 무법자 같았던 아네슨의 작품성향은 그 이후 신중한 태도로 바뀌었다. 신병 때문인지 자화상을 주로 제작하던 것에서 탈피하여 주변의 친구들과 동료들의 초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주변인을 제작하던 것에서 발전하여 현대미술사 속에서 존재하는 예술가들의 우상조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이 피카소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피카소와 벼룩Pablo Ruiz with Itch」로서 아네슨 특유의 유머를 보여준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의 포즈로 등을 긁고 있는 피카소의 모습은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모방한 받침대와 함께 존경, 익살, 조롱을 함께 보여준다.

 

영웅적 조상을 만들어내던 아네슨의 1980년대는 동성연애권리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된 샌프란시스코의 시장 죠지 모스콘(George Moscone)의 동상과 관련된 해프닝으로 시작되었다. 죠지 모스콘의 추모동상을 의뢰받은 아네슨은 받침대 부분에 동성연애자들과 시민들을 자극할만한 문구들을 거침없이 새겨 넣었다. 주최 측이 공개시 천으로 하단부를 감싸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기자들에 의해 일간지 톱기사로 공개 되면서 비평가들 뿐 아니라 동성연애주의자들, 시민들의 거센 비평을 들어야 했다. 혹독한 비평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반응을 냉소적 어법으로 작품에 표현해오던 아네슨은 1980년대 후반부터는 개인적으로 암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를 반핵과 반전에 대한 이미지로 전환하여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작품에서는 단순히 가해자들을 괴물로 표현하는데 그쳤지만 후기 작품에서는 군대의 장성들을 연상시키는 형상들이 마치 핵의 확산과 학살에 동조하는 괴물들로 그려지고 있다. 암으로 투병하는 그 후 10여 년 동안 아네슨은 드로잉 제작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처음 아네슨의 시작은 만화가 지망생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그의 그림들은 준비과정이 아닌 입체작품을 더욱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독립된 작품으로 그의 입체작품과 동등하게 다뤄지고 있다. 1993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자택에서 향년 62세로 암으로 인한 지병으로 작고하였다.

 

next이전글
next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