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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 오티오(Rudy Autio)
  • 작성자한국도자재단
  • 등록일
  • 조회수7687


 

 

3차원 드로잉과 페인팅의 일루젼..그리고 표현주의

루디 오티오(Rudy Autio)

 


 

                                                                                                  [루디오티오, 1926~]

 

 

Ⅰ.루디 오티오의 성장배경


 루디 오티오(Rudy Autio)는 1926년 10월 8일, 미국내 광산도시로 알려진 몬타나주 뷰트(Butte, Montana)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뷰트는 광산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음악, 미술, 스포츠 등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있어 문화도시의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뷰트가 다양한 인종들-유럽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다양한 문화가 어울린 복합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루디 오티오는 미국인이며 광부였던 아버지와 핀란드인이며 요리사로 일하던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 명의 여동생과 두 명의 남자형제가 있었는데 한 명은 어릴 때 죽었으며, 형은 핀란드에서 태어났고 여동생과 오티오는 이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핀란드이민자 공동체 속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핀란드 문화를 경험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핀란드인들의 전통에 따라 그와 그의 가족들은 독실한 루터파 신자였다. 중요한 점은 이 때, 그가 교회가 소장하고 있던 조각, 그림들을 통해 예술적 감성을 기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학창시절(초등학교와 고등학교)의 예술경험은 그가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5년, 오티오의 나이, 9살 무렵은 학교 내 W.P.A(Works Progress Administration)라는 예술 프로그램이 개설되어 학생들이 지역 예술가들에 의해 질높은 미술교육을 직접 받을 수 있었다. 이 예술 프로그램에서 오티오는 그 해 처음 드로잉 전시를 가질 만큼 드로잉에 꽤 두각을 나타내었다.

 군대 제대 후 몬타나에서 건축학 공부를 하던 그는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던 캐롤린 자콥스(Carolyn Jacobs)를 우연히 만나 미술에 눈을 뜨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오랜 친구이자 가장 중요한 작업동료인 피터 볼커스(Pete Voulkos)와 조우했고 그를 통해 처음으로 도예를 접했다. 사실 몬타나는 미국 내 다른 도시들에 비해 문화적 토양이 풍부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연히 그곳에서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밥 드 위즈(Bob De Weese)를 만나 큐비즘를 비롯한  미술사와 현대 미술을 접하면서 미술에 대한 열정을 지속적으로 키울 수 있었다.
 1950년 몬타나 주립대 졸업 후에는 풀만(Pullman)의 워싱턴 주립대학(Washington State Universty) 대학원에 진학하여 주로 조각에 몰두했다. 이 시기 즈음, 벽돌을 생산하던 아치 브래이(Archie Bray  Foundation, in Helena, Montana)에서 피터와 함께 작업장과 가마 등을 지으며 현재 아치 브레이의 기초를 만들기 시작했다. 원래 아치 브래이는 오래 전에 벽돌을 생산하던 26에이커 면적의 공장(Western Clay Manufacturing Company)에 불과했다. 그러나 브레이씨의 예술에 대한 관심과 후원으로 1951년 봄, 루티오와 피터를 주축으로 도예가를 위한 스튜디오와 아트센터를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재단의 기본 정신은 ‘모든 이에게 개방된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는 좋은 작업장소 제공’ 이었다.
 아치 브래이에서 만난 행크 멀로이는 콜롬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에서 회화와 드로잉을 가르쳤는데 주로 말을 소재로 작업했다. 특히, 드로잉과 회화는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주로 등장하는 말(馬)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드로잉은 추상적이었으며, 붉은 색, 녹색의 형체에 검은 색으로 선을 그렸다. 오티오의 작업에서 말의 형태와 검은 색 위주의 드로잉을 미루어 볼 때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짐작된다. 오티오는 인디안 춤, 인디안 복장, 또한 그들의 조각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평소 에스키모 조각도 좋아했지만 직접적인 영향은 발견되지 않는다.
 1952년, 일본의 도예가 하마다 쇼지(Shoji Hamada)와 영국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그리고 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워크숍이 아치 브레이에서 열렸다. 많은 아치브레이의 레지던스 작가들이 그러했듯 볼커스와 오티오는 이 행사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들이 특별히 새로운 테크닉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자유스러움을 강조하는 동양도예의 정신은 그들의 정신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한때 볼커스와 함께 지거링(Jiggering)을 통한 슬립케스팅(slipcasting)방법으로 찻주전자, 찻잔, 병, 사발 등 실용적 그릇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작업을 차츰 줄이고 조각적 작품을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Ⅱ.루디 오티오의 작품 세계


 1981년, 핀란드 헬싱키의 아라비아(Arabia) 공장의 연수과정에 참여하면서. 크기면에서 제약 받던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했다. 예전에는 주로 자기질의 재료로 작업을 해왔지만 공장에서 사용하던 석기질 재료를 사용하게 되면서 보다 제약없이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코일링 기법을 활용하여 기형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 밖에도 밴딩기법(주>벽돌을 쌓아 올리 듯 빚어낸 흙판들의 끝을 서로 이어서 쌓아올리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덴버 테라코타 공장에서 몰드로 기형을 만들고 흙판을 밀어 넣어 찍어내는 가압성형을 배워 테라코타 부조작품을 제작할 때 활용하기도 하였다.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주로 사용하는 기법은 판성형이다. 이 방법은 도예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경제적인 작업 방식으로 여겨지는 방법인데, 여기에 코일링 기법을 섞어 쓰면서 형태를 만들어 가고 있다. 대략  크기는 대게 70~100×50, 80×70~90 cm 내외로 대게 높이가 높고 폭이 좁은 십자형이다.
 초기엔 흙의 거친 표면 느낌과 함께 색화장토를 입혔으며, 부분적으로 금속 광택이 느껴지는 러스터를 주로 사용하여 흑백톤이 주를 이루었다. 검은 선이 굵게 사용되다가 점차 이것이 점차 가늘어지고 심지어 부분적 포인트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점차 다양한 색들이 도입되어 쓰이다 점차 파스텔톤의 색감들로 정착되었다.
 소재는 대게 인간과 동물(개, 말, 소 등)의 형상이 사용되는 데 이러한 소재들은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에콜 드 파리 최대의 화가, 마크 샤갈(Marc Chagall, 1887.7.7~1985.3.28)의 종교화를 연상케 한다. 초기에 정면성이 강한 작품을 제작하다가 80년대 들어서면서 후면으로 돌아가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묘사하여 입체감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발전하였다.

 1990년대, 뉴욕에서 회고전이 개최되기도 했으나, 그의 명성에 걸맞은 수준은 아니었기에 많은 도예인들이 다시 그의 작품이 회고되고 평가 될 자리가 마련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추상표현주의의 살아있는 증인, 루디 오티오. 그의 작업에 대한 지속적인 열정과 미학적 상상력에 다시 한번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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