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자기의 역사 (II)-여주 도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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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 사람이 생활한 역사는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신면 천서리의 파사성 출토 마제석촉과, 점동면 흔암리, 여주읍 멱곡리 등지의 민무늬토기, 마제석부, 빗살무늬 토기 조각등이 당시의 유물로 밝혀졌으며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로는 1977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발굴로 확인된 흔암리의 집터와 반월형석도, 갈돌(碣石), 무문토기, 홍도를 들 수 있고 탄화된 보리, 조, 수수등은 농경문화의 흔적으로서 우리나라 벼농사의 전개경로를 밝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의 유적으로는 여주읍 매룡리 고분군이 있고 그곳에서 출토된 고배, 도자(刀子), 석침(石枕)등 7세기경의 유물들은 당시의 여주지역에 큰 세력을 가진 토호집단이 살았던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이와같은 여주의 역사속에서 도자기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고려말에서부터 시작되며 오늘날의 도예촌이 형성되기까지의 배경 또한 각종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도자기 굽는 곳이 여흥도호부의 북쪽인 관산에 있다. (陶瓷器所 ··· 驪興都護府 府北串山 ··· )는 기록은 여주의 도자기 역사에 대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99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한 북내면 중암리의 고려초기 백자 가마터는 현재까지 알려진 시흥시 방산동과 용인시 이동면 서리와 함께 백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가마터이며 이 두 곳 보다는 가장 내륙의 위치하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도자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여주에서 분청사기 가마터가 북내면 운촌리, 가남면 맹골리에 각 하나씩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장확인 결과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1930년대 일본인 아사카와 히쿠교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고려말기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북내면 운촌리, 상교리, 석우리와 가남면 맹골리, 금사면 상품리, 여주읍 읍내리, 능서면 심도리 등지에서 18개소의 가마터가 있었며 상감청자와 백자, 분청사기등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여주에서는 15~17세기에 걸쳐 도자기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1884년 광주 분원이 없어지자 김현채를 포함한 몇 사람의 도공이 여주에 정착하여 요강과 막사발을 만드는 가마가 있었으며 옹기를 만들던 가마도 현암리, 오학리, 강천면 적금리에 있었다. 1932년 조선총독부 도자기 시험소가 북내면 오학리에 설립되었다. 당시 총독주 중앙시험소의 보고에 의하면 여주에서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으나 원료와 기술이 부족하여 일본에서 기술자를 데려와 개량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주가 유서깊은 도자기의 고장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긴 하지만 시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에서는 도자기의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1950년 한양요업등 5개의 생활도자기 공장이 새로 설립되었고 1960년 후반에는 도자기 산업의 호황으로 많은 공장이 설립 운영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40개소, 1980년대 100여개등이 늘어나 현재는 약 600여개 업체가 여주의 도자기생산을 주도하고 있다. 여주의 가마들은 완성품을 제작하는 것은 물론 초벌구이와 같은 반제품, 유약, 점토, 석고형 등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공장들도 있어 도예에 관한한 종합적이며 산업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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