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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자기의 역사 (II)-광주 도자기
  • 작성자한국도자재단
  • 등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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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조선시대 사옹원의 분원이 설치되어 운영되던 유서깊은 도자기의 고장이다.  분원이란 말은 왕실의 어기와 관청에 공납하던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으로 중앙 관리부처인 사옹원의 "분사옹원"을 약칭하지만 기록에는 "분원" 이란 이름을 많이 썼으며 분주원이라 개칭되기도 하였다.

 

사옹원에서 어기제조 및 공납을 맡은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 태조1년(1392)에 사선서를 설치했다가 사옹방으로 그리고 세조 13년(1467) 사옹원으로 개칭하여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여지도서)양근군조에 의하면 광주 번조소를 남종면으로 이전 설치한 것은 영조 28년(1752)이었다고 하며 매년 봄 가을에 사옹원 관원이 이용자기의 제조를 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원의 역사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 분원전기

1392년부터 임진왜란까지의 시기로 전반기의 가마에서는 중국풍의 문양과 송죽매문이나 간결한 바탕문양 및 달과 별들이 회화적인 수법으로 표현된 청화백자들이 만들어졌다.

15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중국의 문양보다는 한국화된 매화나 새의 문양이 시문된 청화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분원 관요가 설치된 후 우수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던 시기이다.

 

나. 분원중기
1650년부터 1751년에 이르는 약 100년간으로서 임진왜란으로 인한 폐해가 극심하였고 제조기술도 조악해져 굽에 굵은 모래 받침이 붙어 있는 것도 많다.  대표적 가마터로는 탄벌레, 선동리, 상림리, 송정리, 신대리 등이 있다.

17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중국의 명 · 청이 교체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임진왜란 등 국내외의 상황이 격변하였기 때문에 양질의 백자를 생산하기 어려웠다.  "청화안료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청화백자 항아리가 없어 부득히 가화(假畵)로 대신했다"는 기록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다. 분원후기

왕실용가마를 남종면 분원리로 옮긴 1752년부터 1884년 분원이 민영화 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기형은 다양해지면서 화분, 호리병, 각병, 편형, 원호 등이 만들어졌고 연적, 필통 등이 문방구류의 제작이 활발해졌다.  분원후기로 가면서 다시 청화백자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으며 "福"과 같은 글자를 쓴 것과 난초, 매화, 산수도 등의 문양이 많이 등장하지만 필선도 굵어지고 거칠며 청화발색도 진한 것이 대부분이다.  십장생, 연화문, 물고기문, 구름문 등 당시 유행했던 민화와 십장생이 도자기에 시문되어 후기 백자만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경향은 "영조실록"에 "중기에는 철화백자가 유행했으나 지금은 회청으로 그린다하니 매우 사치스러운 풍조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분원에서의 자기생산은 분기별 특징을 갖고 전승되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 장인들의 생계를 보조하는 의미에서 개인적인 생산이 조금씩 허용되기 시작하고 18세기 들어오면서 상인 자본이 개입하면서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하다가 고종 21년(1884) 민영화되었다.

 

지금도 광주분원 가마터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의 백자 파편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등록된 가마터 만도 185개 이상 되지만 현재까지 발굴된 것은 도마리, 번천리, 우산리, 선동리등 4개의 가마에 불과하다.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에는 자기 제작 시기를 기록한 묘지편 뿐 아니라 백자 그릇바닥에 10년간의 간지명이 새겨진 파편등이 있어 분원자기의 연대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15세기 조선초기의 도마리 가마에서는 중국과 한국적 양식이 혼합된 과도기적인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퇴촌면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양질의 백자파편이 다량 출토되었으며 청화백자나 청자는 소량 출토되었다.

 

16세기 중반의 것으로 밝혀진 번천리 5호 가마의 출토품은 거의 순백자이며 청화백자편 3점과 철화백자편 1점 등이 발견되었다.  번천리 9호 출토품도 대부분 경질백자편으로서 매우 정교한 파편들이 발굴되어 당시의 뛰어난 자기제작 기술수준을 가늠하게 한다.

 

17세기 전반기의 것으로 유일하게 발굴 조사된 선동리 가마는 자연 구릉을 그대도 이용하여 만든 반지하식 가마이다.  이 가마에서는 17세기에 들어서 철화백자의 제작이 늘어났음을 알려주는 철화백자편과 백자의 색이 회색으로 변한 조질백자편이 다량 출토되었다.  크리스티 경매에서 840만불(미화)로 낙찰된 철화백자 용문항아리와 같은 철화용문 파편들도 선동리 9호분에서 발굴되었으며 죽문, 포도문항아리 등의 국보급 철화백자 작품도 대부분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18세기 이후 분원 후기의 가마터는 현재 발굴된 것이 없으며 현재의 남종면 분원리에 최후의 관요가 설치 운영되었는데 사옹원의 도제조와 번조관들의 공덕비가 그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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